딸기색 추억
딸기의 철이 돌아왔다.
한 달 전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탐스러운 빨간 딸기는 값이 어마어마하다.
처음엔 마냥 신기하고 반갑다.
두 번째 만날 땐 침을 꼴깍 삼키며 구경을 한다.
그다음부턴 들었다 놨다 망설이다가 어느 날엔 계산대까지 들고 와서는 결국 불매의사를 전한다.
“잠깐만요. 딸기는 뺄게요.”
아주 쉽게 변심할만한 가격이다. 아직은..
드디어 딸기를 샀다.
500g에 9900원!
손이 떨리지만 안 떠는 척해본다.
‘그래. 결심했어! 한팩을 누구 코에 붙여? 첫 딸기는 분명히 맛있을 테니 한팩 더 사자.’
거금을 투자한 딸기가 정말 맛있을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불안하다.
다른 식재료에 비해 딸기가 맛없으면 본전 생각이 나며 굉장히 억울한 생각이 든다.
딸기가 뭉개질까 조심히 씻다가 씻는 자의 특권으로 하얀 꽃이 달려있었을 초록의 꽃받침을 잡고 한입 베어문다.
“아, 맛있다!”
언제나 첫 딸기는 옳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미국 딸기는 커다랗고 단단하여 씹을 때 어석어석 사과 씹는 소리가 났다. 씨가 어찌나 억세고 딱딱한지 먹고 나서 치아 사이에 끼면 소름 끼치게 아팠다. 맛은 그냥 싱싱한 맹맛. 귀국 후 곧 딸기철이 되었고, 한국딸기를 먹어본 아이는 충격적인 맛이라고 했다.
“딸기가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어? 압안에서 녹는 것 같아. 씨가 없나? “
“혹시 두 살의 딸기맛은 기억나지 않니? “
아이는 딸기를 좋아한다. 두 살배기 그 아이가 귀한 보물인 양 딸기를 손에 들고 오물오물 먹던 모습이 떠오른다.
쇠약해지신 외할머니를 뵈러 가던 그날은 새로 나온 탐스러운 딸기를 사갔고, 삶의 희망 같은 아이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방에 모여 앉은 딸 4대. 외할머니. 엄마. 나와 내 딸.
할머니는 증손주를 반기시며 힘들게 일어나 앉으시더니 딸기 중 가장 크고 예쁜 것을 골라 내 딸에게 주셨다.
아이는 침대 위에 냉큼 올라앉더니 증조할머니 옆에 딱 붙어 앉아 맛있게도 먹었다. 커다란 딸기를 세 개나 냠냠 먹었다.
신기하고 귀엽다시며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할머니의 웃음을 보았다.
“우리 아가, 예쁘고 좋은 것만 먹거라~”
그 말씀은 외할머니가 아이에게 주신 마음이었고, 유언이 되었다.
아이는 외증조할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
외할머니는 두 살의 아이가 만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보통 어린 아기들은 나이가 아주 많아 희로애락이 잘 드러나지 않는 굳은 표정의 노인을 만나면 겁을 내기도 한다. 아이는 노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만나는 노인들의 손을 서슴없이 잡고 토닥이는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온기가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부터 전해받은 빨간 딸기에서 느꼈을 사랑과 따뜻함을 아이는 기억하고 있을까?
밖은 추운 날씨였지만 따뜻한 온기와 상콤 달콤한 딸기의 향이 어우러졌던 그날은 빨갛고 예쁜 딸기색이다.
그리움에 색이 있다면 딸기색 일 것만 같다.
올해 첫 딸기는 씻는자의 특권으로 하나, 가족들 성화에 하나. 두 개를 먹었다.
그런데 찬물에 딸기를 씻느라 시리던 손끝에서 피어오른 반짝이는 딸기의 향기가 오랫동안 머무른다.
첫 딸기의 맛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