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기다림을 배운 시간

by 가을꽃나무

오늘은 일이 있어서 친정엄마한테 부탁드리고,

할머니네 있는 솔이를 늦게 데리러 갔다.


헐레벌떡 문 앞에서 번호키를 띡띡띡 누르는데,

문 안쪽에서 “엄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나는 웃음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언제나 두 팔 벌려 달려와 안기던 솔이는 온데간데없고, 팬티만 입은 채 쫑알쫑알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바지가 저져 떠요.”


젖은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친정엄마가 그 말을 알아들으셨는지 웃으며 덧붙이셨다.


“물을 먹다가 흘렸어.”


“어, 옷이 젖었구나. 어떡하지?”

내가 묻자, 솔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음… 지배 어떻게 가?”


그때 할머니가 맞장구쳤다.

“그럼 할머니네서 자고 가야겠네~”


그러자 솔이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응, 바끈 추우니까 자고 가야대.”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늘 “지배 가~” 하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밖이 추워서 자고 간단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내일 어린이집 갈 옷이 떠올랐다.

그래서 솔이를 할머니네 재우고

내가 아침 일찍 데리러 오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내가 간다니까 자기도 가겠단다.


감각이 예민한 아이인데도

젖은 옷을 다시 입고 나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오는 길,

요즘 솔이가 TV에 너무 빠져 있어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 안에서도 계속 말했다.


“엄마, 티비 보고시퍼.”


내리자마자 또 티비를 찾았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떡하지, 이번엔 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서 말했다.

“집에 가면 신발 벗고, 손 닦고, 세수하고,

그다음에 티비 보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부터 씻게 했다.

그런데 손을 씻다가 또 옷을 젖혔다.


“옷이 젖었어, 추워! 다 벗자!”


솔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니야, 티비 볼꺼야!”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욱하고 올라올 뻔했지만,

나는 조용히 솔이의 눈을 마주쳤다.


“그래, 알았어. 티비 보세요.”


그러곤 머리를 굴렸다.


우리 욕실엔 동물친구와 풍선가족들이 있다.

그래서 상황극을 시작했다.


이미 티비 앞에 앉은 솔이가 들리게끔

조금 크게 목소리를 냈다.


“동물 친구들아, 오늘은 엄마랑 놀아야겠다.

솔이가 티비 본다고 너희랑 안 논대.”


순간, 조용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말했다.


“우와~ 엄마랑 오랜만에 놀아볼까요?

랄라랄라라~”


그랬더니 솔이가 “아니야! 동물친구 놀 거야!” 하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결국 물놀이가 시작됐다.


나는 옆에서 편히 놀 수 있게 이것저것 챙겨주다가,

솔이의 물장난에 내 옷이 젖어버렸다.


“안돼!”

비명 아닌 비명이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내 안의 샤우팅이 올라올 뻔했다.


그러다 문득,

‘어차피 젖은 건데, 혼내면 뭐 할까.’

싶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같이 놀자.

전에는 인상 쓰거나 한숨을 쉬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크게 화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금세 눈치챈 솔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그렇게 나도 물속으로 들어갔다.


솔이는 동물 친구들이랑, 풍선 가족들이랑,

한참을 신나게 놀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목욕을 하며 놀아본 적이 있었나?

누군가 내 ‘때’를 받아준 적이 있었나?


어릴 때의 기억 속 목욕탕은

딱 한두 번, 바쁜 엄마 손을 붙잡고 간 장면뿐이다.

그마저도 잠깐의 기억일 뿐,

그 안에서 놀아본 적은 없었다.


집에서는 옷을 다 벗고 씻어본 적이 없었다.

가난했던 것도 있었지만,

맞벌이 부모님의 사각지대에 있던 우리 자매는

오빠들의 폭력 속에서 보이지 않는 멍을 달고 살았다.


장난을 치는 것도

때로는 폭력으로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목욕의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솔이의 웃음소리와

욕실 가득한 물소리,

그리고 동물 친구들의 대화가 뒤섞여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목욕을 하며 놀아본 적이 없던 나,

누군가 내 ‘때’를 받아준 적 없던 그 어린 날의 나.


그때의 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물속에서, 솔이의 웃음 사이로.


씁쓸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따뜻했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일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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