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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라임 Oct 18. 2022

전 직장 워크숍 따라가기

백수로그 EP 16

* 2022년 4월 작성


 회사를 그만둔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락이 온다. 현장에서 세상 무너지는 듯 다급한 전화를 받았고, 이미 다 무너졌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묻는 직장 동료의 한숨도 들어봤다. 그래도 괜찮았다. 난 이제 그 어떤 의무도 없는 퇴사자니까, 한편으론 '고생들 하는구먼.' 하며 금세 잊어버리는 쾌감까지 느꼈다.


 그러다 지난주에 또 전화가 왔다. 당연히 업무 관련 전화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주 팀 워크숍에 같이 가자고 했다. 강릉으로 1박 2일 간 팀원 5명이 가는 워크숍에 나도 오라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조금 어색한 것이 나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 입사한 분도 그 자리에 오시는 거였다. 나는 그분을 볼 수가 없어서 인수인계서만 작성해놓고 나왔는데, 실제로 일을 해보면 문서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에 대한 업무 방안을 어찌 문서 몇 장에 담을 수 있을까? 가령 같은 일이라도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진다. A에게 전화가 오면 이메일로 '원인 분석, 대처방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달해야 하고, 같은 일이라도 상대방이 B라면 그런 건 됐고 대응 일정만 잡으면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지 않던 팀원도 한 명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일을 못 할뿐더러 남한테 미루기까지 했던 분. 이전 퇴사자들을 보면 사무실 곳곳을 돌며 작별 인사를 나누던데,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분 때문이었다. 난 정해진 시간에 평소 퇴근하는 사람처럼 그냥 나왔다. 일을 못&안 하던 분의 얘기를 들은 배우자는 "눈치가 없어서 그래."라고 했는데, 이번에 강릉에 가보니 정확히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그렇다. 나는 전 직장 워크숍에 따라갔다. 주류를 포함한 식비, 숙박비 일체를 법인카드로 해결하는 그 공짜 이벤트를 놓칠 수 없었다. 심지어 회사에서 출발하는 팀장님 차까지 얻어 탔다.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에 역시 놓칠 수 없는 옵션이었다. 물론 팀장님 차를 탄 이상 "다시 일해보지 않을래?"와 같은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기름값보다는 스트레스가 덜해 받아들일만했다.


 그들은 나를 반겼고 금세 어제까지 본 사람처럼 대했다. 물론 그들의 업무는 끊이지 않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도 몇 시간은 각자 일 하고, 고객사와 전화 통화를 했다. 나도 그 상황이 어색하진 않았다. 여전히 내가 몸 담았던 프로젝트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며 거들기도 했다.


 긴 저녁 자리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첫째는 당연히 그들의 일 얘기였고, 그다음은 나의 근황이었다. 새로운 모 국가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사업은 "해외 사업 담당이었던 네가 해야 하지 않겠냐?"부터, 현재 진행 중이던 사안들은 "역시 네가 해야겠네."라며 들이밀기도 하셨다.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몇 번은 '내가 모든 걸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현재 진행 중인 그들의 일을 나는 추억했다.


 그들도 직장인인지라 나의 퇴사 후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생활비부터, 그 많은 시간을 어디다 쓰고 있는지 까지. 또한 지금 배우는 것들은 대체 왜 하는 것이냐며 궁금해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무슨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간 사람 마냥 시간이 남아돈다고 생각하셨다. 사실이었지만 생각만큼 뭘 해도 시간이 가지 않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잠자리에 들면서 누가 그랬다. "잘 오셨어요. 또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라고. 나에게 이번 워크숍은 편안하게 오랜 시간 동안 나눈 작별인사 같았다. 변변치 않던 나를 받아줬고, 당시엔 내가 다닐 수 있었던 최고의 회사. 외근을 마치면 일찌감치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을 시간까지 주던 회사. 그리고 지금은 형, 동생 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만난 회사. 그동안 월급에 보너스까지 거의 꼬박꼬박 챙겨줘서 고마웠다.


 판교 지날 때 또 인사 나누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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