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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Apr 05. 2023

조금 하찮은

<해바라기> 15.2x20.3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3_ 윤미내


봄이면 그동안 움츠려있던 꽃봉오리들이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켜듯 피어오르며 만개한다. 여러 매체에서는 추운 겨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설렘을 꽃소식으로 전하며 사람들을 야외로 이끈다.

모두가 꽃구경에 빠져있을 때, 무리 속의 한 음악가가 문득 짝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은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계절 속에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SNS에 인증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는데, 하필이면 이 음악가는 꽃내음 속에서 짝사랑하는 그녀의 샴푸향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그날의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꽃향기를 샴푸향으로 착각한 순간을 떠올리며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진심은 통했고, 노래는 드라마와 라디오로 전해지면서 전 국민이 알고 사랑하는 대중가요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스쳐 지나간 건가 뒤돌아보지만 그냥 사람들만 보이는 거야~” [장범준 _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우리의 일상은 매일 중요한 업무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차례대로 해결하며 바삐 흘러간다. 그러기에 순간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고 뒷전으로 미루기 일쑤다.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그런 감정까지 돌보다 보면, 분명 시간을 쓸모없이 보냈다는 죄책감으로 후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반짝이는 찰나를 만나더라도 우리들의 관심과 시간을 붙잡기에는 짧은 기억의 조각이고, 그래서 조금은 하찮다고 여기며 마음 깊은 곳으로 무심히 흘려보낸다.

 

하지만 다행히도 순간이 주는 잠재력을 믿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흘러가는 찰나를 발견해서, 하찮음이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은 그 감정은, 우리가 힘들고 지치는 날 찾게 되는 노래와 영화, 책, 그림이 되어, 휴식을 주고 위로의 임무를 성실히 해낸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순간의 감정들이 오히려 일상의 위로와 보상의 존재가 돼주다니, 참 모순적이다.  



나는 일상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음악가의 ‘샴푸향'같은 기억은 매일 찾아와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볼에 붙어있는 속눈썹’을 발견하고, 학창 시절의 친구가 생각날 수 있다. 그날은 업무가 많은 날일지라도 당시 유행했던 음악을 온종일 들으며, 추억으로 버텨낼 수 있는 하루가 될 것이다.

뜻하지 않게 ‘구멍 난 양말’을 신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 받은 일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전할지 모를 일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은 형태나 종류가 다양하다. 그 속도와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루의 임무를 묵묵히 해내고, 또 다른 하루인 내일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혹시 나조차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 소중한 기억들이 부활했고, 그 기억이 때론 설렘으로 때론 그리움으로 일상 속에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동기가 돼준 건 아닐까.

가끔은 마음 깊은 곳으로 무심히 흘려보냈던 순간을 꺼내 보자. 조금 하찮게 다가와 돌보지 못했던 기억이 우리의 일상을 어루만지며, 오늘을 웃게 하고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될지 모른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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