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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Jun 23. 2023

우중사색

<우중캠핑> 15.2x20.3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3_윤미내


갑자기 내리는 비에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들어가게 된 허름한 카페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내가 앉았던 그 카페의 자리는 천장 부분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 유리로 부딪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비가 오니 망정이지, 해가 쨍한 날에는 닦기 힘든 높은 위치의 저 유리창이 분명 더러워 보일 거라는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카페 안은 커피 향과 담배 냄새가 섞인 묘한 내음이 났는데, 비 오는 날의 어둑한 회색빛, 축축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왠지 그 분위기가 좋아서 예상한 시간보다 더 오래 카페에 머물렀다.


대학 시절에는 비가 오면 종종 학교에 가지 않았다. 전공 교수님께서 “오늘 미내 안 왔니?”라고 물으면, “비 오잖아요.”라며 대답해 주는 눈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학가의 주점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평소 오픈 시간보다 몇 시간 앞당겨 가게 문을 열었다. 일찍이 한량의 삶을 동경한 나는 뚜렷한 직사 없이 놀고먹던 양반처럼 주점에 자리를 잡고 동동주와 전을 즐겼다. 창밖을 보며 마시는 동동주는 빗물이 되어 내 혈관을 타고 달콤한 수액처럼 꽂혔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의 거실 바닥과 발바닥의 꿉꿉한 마찰감이 나는 몹시 싫다. 열심히 손질한 머리가 비에 축 주저앉아 흐트러지는 것도 못마땅하다. 흰색 바지를 꺼냈다가 ‘아차’하며 다시 서랍으로 접어 넣어야 하는 불편함도 싫다. 지금은 건조기라는 신문물이 생겼지만, 마르지 않는 빨래를 기다리기도 힘들다. 지하철 안의 퀴퀴한 냄새는 참기가 힘들고, 온종일 들고 다녀야 하는 우산의 존재도 귀찮다.


비로 인한 현실적인 불편함을 겪기는 싫지만, 비 오는 풍경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일은 좋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 텐트 안에서 우두둑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중 캠핑을 즐기는 것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비를 맞으며 철수할 때는 그 힘듦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축축해서 무거워진 텐트를 접을 때면 내가 텐트인지 텐트가 나인지 정체를 구별하기가 힘들다. 비에 젖은 나는 춥고 비를 피해 어디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늑한 곳에서 차 한 잔을 즐기며 창밖으로 보는 빗줄기는 감미로울 뿐이다.



비는 마치 인생과 같다.

아픈 첫사랑의 비를 맞는 이는 그 시림에 밥 한술 뜨기가 힘들지만, 까마득한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가 보는 그의 모습은 아픔마저 청춘의 싱싱함으로 느껴진다.

공부의 소나기가 내리는 학창 시절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시절이 한 걸음 뒤로 지나갔을 때는 ‘학창 시절’이라는 단어만으로 그리움에 가슴이 설렌다.

길에서 떼를 쓰며 드러눕는 아이를 제어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떤가. 우박을 맞은 듯 난감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의 참고 있는 웃음은 입술 사이를 기어이 뚫고 나와 ‘푸’ 소리를 낸다.

현실로 마주할 때는 그것이 아름다운지 아득한 추억이 될지,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다. 비를 맞을 때는 주변의 풍경도 온도도 냄새도 느끼지 못한 채, 내리는 빗줄기를 견디지 못하고 함께 흘려보내니 말이다.


인생은 우산 없이 내리는 비를 맞을 때도 있고 창밖으로 빗줄기를 감상할 때도 있는, 그런 날들이 교차하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든 갑작스러운 비를 만날 수 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비를 피할 수 있는 카페도 우산을 파는 편의점도 곳곳에 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퍼붓는 장맛비도 언젠가는 그치기 마련이다. 비 오는 창밖을 감상하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우산을 가지고 나와 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맑고 청량한 하늘이 반겨준다는 교훈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생은 마치 비와 같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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