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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Sep 25. 2023

술이 말을 걸어올 때

<쉼> 15.2x20.3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3_ 윤미내


테트리스 게임의 고수가 각기 다른 모양의 도형을 기가 막히게 쌓아 올리는 것처럼, 차의 트렁크에는 빈틈없이 캠핑 짐이 가득 차 있다. 짐을 하나씩 꺼내어 땅에 내려놓는다. 봄과 가을에는 계절이 주는 다정한 온도를 느끼며 자연에 대한 감사함으로 캠핑을 시작할 수 있으나, 여름의 캠핑은 사정이 다르다. 어지간해선 하계 캠핑은 계획하지 않으나 어쩌다 초여름의 기온을 만날 때면, 맨땅에 집 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위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온몸에서 흐르는 땀을 땀이라 생각하면 집을 완성할 수 없다. 땀이 아닌 빗줄기라고 여기면서, 텐트를 다 치고 나면 이 빗줄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자꾸 세뇌해야 한다. 자칫하고 땀이라 인식하는 순간, 그 찝찝한 고통은 짜증이 되어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마다 맺히고, 누군가에게로 튕겨갈 것이다. 이때 땅에 내려놓았던 아이스박스 안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한 모금 마시고 일하는 건 어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스박스 뚜껑을 연다. 몸에 땀방울이 아닌 차가운 살얼음을 단 청량한 색의 캔 맥주가 말을 건넸다.


불볕더위로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린 여름날, 저녁 샤워를 마치고 난 후 어디선가 맥주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집 냉장고에서 들리는 속삭임일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맥주를 사다 놓지 않은 날은 집 근처 마트의 냉장고 속 맥주가 부르는 소리일 수도 있다.

"어서 나를 집어 가. 빨리 와서 나를 사!"

샤워까지 마친 상태라 마트까지 가기에는 귀찮은 마음이 들지만, 맥주의 간절한 부름에 잠시 고민한다. 이 고민은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과 사물의 밀땅 순간으로, 안 겪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경험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술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하얀 도화지에 잿빛 연필로 촘촘히 톤을 채워가는 소묘의 한 장면처럼, 멀리 보이는 하늘 저편에서부터 먹구름이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비를 한껏 품었던 구름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후드득 빗방울을 떨어뜨리면, 지글거리는 기름기 가득한 냄새와 함께 밤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난다. 기름기를 머금은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막걸리의 안주가 될 수 있다. 각종 전, 피자, 잡채… 막걸리 특유의 텁텁한 맛은 기름기를 관대하게 품어준다. 안주와 함께 사발 그릇에 막걸리를 콸콸 따라서 마시고 있노라면 막걸리는 내게 말한다.

"비가 오니 내 생각이 났구나?"


우리나라 고유의 술로 막걸리가 있다면, 요즘은 서양의 술로 와인을 즐겨 마신다. 와인은 대게 치즈나 파스타와 어울릴 거라 생각하지만, 우연히 떡볶이와 함께 했을 때 그 어떤 안주보다 와인을 맛있게 즐겼다. 그 후로 떡국, 가래떡과 함께 와인을 즐겼는데 치맥, 피맥의 궁합보다 더 환상의 조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인은 말했다.

"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와인은 동서양의 음식을 막론하고, 까다롭지 않고 무던하게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어느 날은 지인의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여러 가지 다과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차가운 와인을 마시고 싶었는데 실온에 있는 와인만 있을 뿐, 칠링 와인은 없었다. 파티 주인장에게 정중히 얼음을 부탁했고, 와인 잔에 얼음을 넣어 와인을 따라 마셨다. 파티의 손님 중 몇 명이 그 모습을 의아해하며, 얼음 때문에 고급 와인의 숙성도가 희석되어 깊은 풍미를 헤치는 것이 아니냐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시원한 와인을 맛있게 마셨고, 당시 와인도 내게 말했다.

"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위스키가 말을 건넨다.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는 맥주나 막걸리처럼 배가 불러 손과 머리를 착하고 둔하게 만드는 술은 피하는 게 좋다. 조금은 세고 센서티브 한 위스키 온더락이 제격이다. 유리잔에 얼음 몇 알을 넣어 위스키를 붓고 얼음을 조금씩 녹여가며 음미하는 위스키는 그 섬세함이 혀끝에서부터 뇌까지 짜릿하게 전달된다. 그리고는

"고단하지?"

하며 창작의 힘듦을 잠시 소독해 준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포도주를 함께 마셨고, 취하지 말라고 하셨지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물론 지극히 애주가적인 왜곡된 해석이다. 하지만 일상을 살다 보면 술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조금 지쳐있을 때, 유난히 덥고 힘든 날, 축하받는 기쁜 순간, 고독하고 외로울 때... 술은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지나친 과음은 화를 부른다지만, 먼저 말을 건네준 술에게 화답하며 하루의 피곤을 풀어보는 건 어떨까. 좋은 사람, 좋은 음악과 함께라면 이보다 행복한 습격은 없을 것이고.

글을 마무리하며

"한잔 더 어때?"

라는 위스키의 부름에 응답해 주러 간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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