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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Oct 13. 2022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15.2x20.3 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2 _ 윤미내


밤의 짙은 푸른색과 낮의 짙은 붉은색이 만나, 저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 프랑스어로는 L’heure entre chien et loup. 직역하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무렵의 낮인지 밤인지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짧은 순간은, 내 마음도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어릴 적에는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싫은 나이인데 곧 밤이 될 시간이고, 씻고 잘 준비를 해야 하니 씁쓸하고 우울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어스름해지는 이 시간대가 좋았다. 더 이상 일찍 자야 하는 아이가 아니기에, 재밌는 거리가 많은 밤을 기다리는 해질녘은 설렘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본격적인 살림을 하면서 이 시간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일을 끝내고, 바삐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를 씻기고, 잘 준비를 해야 했다. 주부가 가장 바쁠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시간대가 선물같이 주어졌을 때, 석양의 황홀하고 묘한 찰나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게다가 혼자 운전 중에 만나기라도 할 때면, 퇴근길 교통체증은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차가 막힐수록 내게는 달콤한 연장전인 것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해질녘의 모습도 좋지만 차 안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맞이하는 순간은, 그대로의 나를 느끼기에 아무런 장애요소가 없는 완벽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되어 운전면허부터 땄던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지난날의 단편적인 기억이 마구잡이로 스쳐 지나간다. 끝없는 사랑만 받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가슴 아팠던 순간이 떠오를 때면 붉은 석양처럼 마음이 뜨거워진다.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찾아올 때는, 홀로 차 안에 있지만 어디론가 숨고 싶어 진다.

언제부터인가 개와 늑대의 절묘한 시간대와 밀폐된 공간인 차 안이라는 조합은, 현실에서 벗어나 추억을 반추하는 충분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매일 같은 시간에 차로 출퇴근하는 이들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연히 찾아오는 이 순간을 격렬히 반길 수밖에 없다.


개와 늑대의 시간.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혼자 운전 중이다. 라디오에서는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흘러나오는데, 도로는 차로 꽉 막혀있다. 자, 이제 나는 아름다운 감격의 순간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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