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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Oct 12. 2022

창작의 이유

<쉼> 15.2x20.3 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2 _ 윤미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는데, 그 많은 할 일 중에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마 창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일은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으면서도 힘든 일이라서 ‘창작의 고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게 창작의 고통은 그림이다. 이제는 글까지 쓰겠다고 나섰으니 그 괴로움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창작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고통뿐만 아니라 기쁨과 치유, 반짝하는 교훈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음이 힘들 때 그려낸 그림은 성취감과 깨달음이 크다.


언제인가 지인과의 대화에서 나면서부터 몸이 아픈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면서부터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몸이 아파 자주 앓는 사람처럼 마음이 자주 아픈 사람도 삶이 불편하고 저 자신이 못마땅할 것이라며 말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도 마음을 쓰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불안을 먼저 심어둔다. 시련이 닥쳤을 때는 공유하기보다는 보관하는 편을 택하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나는 태어나기를 무른 마음으로 났는지 어릴 적부터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사람들에게 그 상처는 예민하다는 말로 표현되었고 간혹 섬세하다고 듣기 좋게 말해주는 이도 있었다. 나는 여리고 약한 마음을 예민하다고 정의한 것이 억울하면서도 그런 상처들에 시간을 소비하는 기벽이 고쳐지지 않았다.

그 시간을 분산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을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에서 찾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 그리는 재주가 있었고 그 행위를 좋아했다. 상처에 약효가 될 만한 것을 일찍이 찾은 것이다. 그리고자 하는 사물을 찾고 관찰하며 그대로 도화지에 표현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사물에 몰입해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 몰입의 시간은 고단한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내게 처방이자 방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되어 마음이 힘들 때는 종이 앞에 앉고 연필을 쥐는 것조차 힘들어 제 페이스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몰입의 순간에 앞서 힘든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림을 꺼냈다가 들여놓고, 그때의 기억을 살려내었다가 뭉개기를 반복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시작한 그림을 중도에 그만둘 배짱은 없었으니,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완성이라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  

지금도 과거의 그림들을 들춰 본다. 이제는 희석된 두려움이지만 그림은 남아있다. 이것은 내가 여전히 그리는 일을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이렇듯 그림을 완성하며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고된 과정 후의 깨달음이라기엔 허무하고 우스운 교훈일지 모른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며 더 각인될 수 있는 순간이 잊히다니, 이해하기도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두려움과 싸우며 그림을 완성해 내는 동안, 망각의 산물인 나는 힘든 기억도 아픔도 지워지고 있음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두려움은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마주하기 전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막상 나를 불안하게 하고 무너지게 만들었던 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불확실한 기억들에 대한 추측이 대부분이었고 실제의 두려움은 예상했던 부피보다 작았다.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인 것에 안도하며 그림을 그렸고, 그 안도는 위로가 되었고 결국 망각할 수 있는 과정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는 행위는 내게 이와 같은 깨달음을 처방해 주며 마음이 튼튼해지도록 훈련시켰다. 현재는 그리기와 함께 글쓰기라는 방법으로도 나를 치유하는 중이다. 그림으로 충족하지 못한 부분을 작업 노트에 적어두고는 했는데,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힘을 싣고 있다. 불안과 상실이 그리게 했다면, 지금은 일상의 순간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쓰고 싶게 만들었다. 마음을 요란하게 만드는 것에서 잔잔해질 수 있는, 심연 속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글로 나누고 싶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것보다 깊이 있는 그림으로 풀어나가는 방향이 내게는 더 수월할 수도 있다. 뭐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곧잘 삼켜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글을 그려보기로 생각을 전환했다. 그리기는 내게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이다. 자꾸 쓰려고 생각하니 도무지 그리기만큼의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린다’라는 마음으로 글을 대하고 있다. 내 글이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 유화가 될지, 맑고 투명한 수채화가 될지. 또는 섬세한 세밀화의 모습이 될지, 아찔한 속도감의 크로키가 될지. 그도 아니면 그냥 낙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그림이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계속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예상대로 창작의 고통과 두려움은 두 배가 된 셈이다. 하지만 처방 효과는 두 배 그 이상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는 나를 소통하게 하고, 창작의 이유를 더욱 굳건하게 끌어올려 주는 동아줄 같은 존재이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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