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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Nov 05. 2023

당신, 비서관 실격!

지금 모시는 분을 평가한다는 게 조심스럽지만, 이건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의전에 대해선 관대하다는 걸.


내가 비서관 자리로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를 정도로 난 의전에 젬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간소한 출퇴근 옷차림, 자기 업무가 끝나면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칼퇴근, 각종 주말 행사(등산, 자전거 타기 등)에 불참. 전화랑 카톡도 무음이라서 신경 안 써, 상사와 출장을 가면 길 헤매는 건 기본이고 맛집도 관심 없어서 아무 데나 가자고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예전에 모시던 과장님은 나보고 맛있는 거 사준다고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어보면, 난 항상 "회사 가까운 식당이 제일 편하고 좋다"라고 그러는 바람에 과장님이 식당 예약하고, 차로 날 데리고 다녔다. 오죽하면 과장님은 나에게 MZ세대 같다고 할 정도였을까.


그런 내가 비서관이라니.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답답한 정장 옷차림뿐만 아니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탈 때나 관용차를 탈 때, 식당에 갈 때, 심지어 둘이 걸어갈 때조차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 댔다.


인터넷도 뒤져보고, 타부처에 아는 수행비서들에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지만 딱 명확한 답도 없고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나보고 항상 그러셨다.


"굳이 나와서 엘리베이터 잡지 말고 그냥 자리에서 인사하면 된다"

"등산 나 때문에 굳이 갈 필요 없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일 없으면 그냥 퇴근해라"

"차 탈 때 내 문은 내가 열게"


등등 내가 해야 할 행동 하나하나를 알려주셨다. 문제는 이걸 진짜 믿어도 되는 가였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진짜 등산 안 가도 되나? 퇴근하라는데, 괜히 먼저 퇴근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안건 검토 제대로 못했다고 깨지는 거 아닌가? 이런 고민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한 지 몇 개월, 도저히 내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안 되겠더라. 언젠가부터 지시한 대로만 하기 시작했다. 집에 가도 된다고 하면, 바로 컴퓨터 끄고 퇴근한다고 인사드렸다. 굳이 외부 행사에 안 따라와도 된다고 하면, 안 갔다. (주변에서 왜 비서관이 안 따라왔냐고 묻는 경우도 많았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시키는 대로 해도 괜찮았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이후부턴 마음이 편해졌다. 식욕도 돌아와서 급격히 빠지던 살도 다시 찌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내 표정이 예전처럼 밝아졌다라며, 이제 좀 비서관 자리에 적응한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둘이서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그분께서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시겠다고 하셔서 난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기 심심해서 앞에 보이던 사무관님과 잡담을 했는데,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저녁을 모시러 가는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분을 잃어버렸다. 화장실에도 없고 엘리베이터에도 없었다.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다가 빨리 1층으로 내려가야겠다 싶어서 뛰어가는데, 전화가 왔다.


"이 비서관, 지금 어디 있나? 내가 식당에 먼저 가있을  테니, 비서관은 뭐 시키면 되나?"


나는 당황했지만 조심스럽게 '볶음밥이요..." 이러면서 열심히 뛰어갔다. 속으로 '난 비서관 실격이다'란 말을 되뇌면서. (물론 그 일로 혼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그 일을 언급하신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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