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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Jun 25. 2024

그래, 열심히 했으니 됐다.

에필로그

처음 비서관 제의(?)를 받은 건 의외였다. 난 그 상사와 함께 일해본 적도 없어 서로 거의 알지 못하는 관계였고, 무엇보다 난 의전에 젬병인 사람이라 비서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부처에서 그 비서관 자리는 의전보단 법령을 검토하는 게 주된 업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의전이나 일정관리를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중앙행정기관의 부기관장은 매주 참석해야 하는 차관회의를 비롯하여 각종 출장이나 참석해야 하는 회의 등이 꽤 있는 만큼 비서관도 챙겨야 할 것들도 많다.


힘들고 어려운 자리였지만 대신 이 자리에서 얻은 점들도 셀 수 없이 많다. 평소 다른 자리에선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업무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행정, 조직, 세제, 금융,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법령을 검토하였고, 중압감에 대처하는 법과 돌발 질문에 대답하는 순발력을 익혔으며, 나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인 의전도 보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부처를 비롯해 타부처의 공무원들에게서도 괜찮은 평판을 얻었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자리에 가서 만날 상사들이 나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안타깝게도 잃은 점도 있다. 대표적으로 건강이다. 사실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비교해 보자면 지금으로선 잃은 게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 완전히 회복될지 모르는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공무원이 되어선 어떤 자리에 가든 난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하려고 했다. 비서관 자리가 부처 내에서 욕먹기 딱 좋은 자리라고 하더라도, 나의 일은 상사를 잘 보좌해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가끔은 무례하게도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며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고, 종종 직장 동료에게 상사의 행동을 해명하기도 했다. 무조건 상사의 말에 따르고 나쁜 여론을 숨기는 것보단, 최대한 상사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비서관으로서 난 할 말은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상사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사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난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해석하려고 들진 않았다. 그냥 그의 모든 말은 진심이라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전보다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상사가 우리 보고 일 없으면 퇴근하라고 하면 퇴근했고, 주말에 굳이 나올 필요 없다고 그러면 나오지 않았고, 오늘 점심 약속 있냐고 물었을 때 약속이 있으면 있어서 같이 먹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처음에야 점심 거절이 힘들었지, 몇 번 거절하고 나니 나중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내가 보좌하는 방법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상사가 혼자 야근하거나, 점심에 혼자 밥 먹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혹자가 보기엔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비서관 입장에선 충분히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상사는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사 입장에선 내가 더 편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 그래서 난 나름 내 방식에 만족했다.




말이 길었다. 어쨌든 난 비서관 자리에서 나왔다. 몸이 아파서 중도하차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1년 3개월 동안 비서관으로서 보낸 기간은 충분히 길었다고 생각하며, 이때의 경험은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에서 좋은 양분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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