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핀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며, 실존이라는 본질은 우리에게 불안을 선사한다. 전세 계약이 만료된 주택의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냥 가볍게 무시하던 고통이 큰 질병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을 든다. 전세금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큰 질병에 걸려서 막대한 병원비가 필요할 순간을 대비하여 우린 보험을 들고, 그러한 상황이 터졌을 때, 보험의 덕을 보며 안심하고, 그 시련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극한 불안한 존재인 현존재는 모든 비극을 대비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 비극들은 모두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지만, 생각치 못한 비극에 비하면 우리가 인지하고 대비할 수 있는 비극은 굉장히 적다.
왜 인간에게 비극이 일어날까? 그건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신이라면 난 월세걱정 없이 살 것이며, 건강과 죽음에 대한 염려로 불안과 우울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전지전능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데 왜 걱정을 할까? 난 유한한 인간이기에 불안하고 우울한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내가 사는 이 은하계는 점보다 작고, 그 은하계에서 내가 사는 이 행성은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구는 그저 태양이라는 항성을 공전하는 행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지구에 80억 명가량의 현존재들이 실존을 영위한다. 그중에 내가 사는 대한민국의 인구는 160분의 1에 불과한 5천만을 간신히 넘긴다. 그리고 내가 사는 서울시는 그중에 비중이 크다. 이 나라 국민의 5분의 1이 이 서울이라는 좁은 도시에 산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동대문구의 인구는 약 34만이더라. 그 와중에 내가 사는 이문1동의 주민은 약 1만 9천 명 정도다.
나라는 존재는 80억 명 중에 5천만에 속하고, 그 5천만에서 다시 천만에 속하고, 그리고 동대문구라는 34만 명에 속하며, 2만 명이 안 되는 이문1동에 속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문동에서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주민이다. 가끔 외대에서 식사를 하며 근처 카페에서 독서도 하고, 중랑천을 산책하는 범인에 불과한 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처럼 나는 그냥 수많은 점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문동이라는 직선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점이며, 동대문구 그리고 서울시라는 평면과 입방체에서 난 더욱 보잘것없는 점으로 존재한다. 한국인이라는 존재들의 집합, 그리고 세계인이라는 존재들의 집합에서 난 더욱 보이지 않는 작은 점에 불과할 것이다.
나의 비극과 고통은 결국 이 세계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수많은 점으로 어어진 직선과 선으로 면을 만든 입방체에서 80억 개가 넘는 점이 있는데, 그중에 단 한 개의 점이 사라진다고 그 입방체에 눈에 띄는 구멍이 생기거나 그것이 무너질까? 그렇지 않다. 그 점의 고통은 그저 그 점의 세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다른 점들은 그 고통을 공감하지도 형언하지 못한다. 그저 표상만을 보기 때문에 그 비극의 본질과 당사자의 찢어지는 마음을 알 수 없다.
우린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그 누구도 원해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존재하기 전에 세상에 나가기를 원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건 불가능하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데카르트가 맞나 보다. 따라서 원하지 않은 채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하이데거 또한 맞는 것 같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전에 우린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다. 따라서 비극과 시련을 맞이할 때 우린 굉장히 억울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내 계획에 이런 일은 없었는데... 이런 푸념을 하며 불안과 공포라는 감정을 언어로 드러낸다. 원치 않은 채 태어나고, 예상치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시련을 맞이하다니. 인간은 살얼음판을 걷는 어린아이처럼 위태로운 존재이다. 운이 좋다면 살얼음판에서 놀이를 하다가 무사히 귀가를 하고, 운이 좋지 않다면 물에 빠져서 옷이 젖어 추위를 겪거나 더 운이 좋지 않다면 목숨을 잃는다. 이런 불안한 존재이기에, 염려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고통받는 인간은 그래서 신을 발명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면 신께 감사하고, 그러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며 정신승리를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신은 없다. 과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에 존재했다면 그 신은 인간에 의해 죽었다.
불완전하며 동시에 비극을 피할 수 없는 현존재는 비극이나 시련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서 울고 곡소리를 내어도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듯이, 그러한 시련을 맞이했을 때 탄식이나 불안, 절망, 슬픔 등은 그 고통을 이겨내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절망은 나에게 더 큰 절망을 선사하고, 부정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해석학적 순환과도 같이 이러한 부정에 빠지면 나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만 하며 불안해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슬퍼만 하며 세월을 보낸다면, 결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며, 일어나지 않았을 부정적인 일까지 일어나게 만든다. 슬픔 속에서 그저 울기만 하고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울고, 다시 걷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서 앞으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눈물을 닦고 새로운 목적지로 달려갈 것이다.
비극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은 결국 나를 잃는 것이다. 나는 부정의 노예가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울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은 비관적으로 보이고, 나의 존재가치는 바닥보다 낮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 속에서 이제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한다면 그는 부정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그 존재는 차근차근 이 미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고, 그 실현이라는 기투와 함께 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그러니까 비극이 닥치면 우린 더 차가워져야 한다. 요즘 말로 T가 되어야 한다. 비극이 오면 어 왔네? 어떻게 없애지?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비극에 사로잡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심연 속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세상에 나를 죽일 수 있는 고통은 없다. 죽었다면 나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죽었는데 고통을 느꼈다면 그건 죽은 게 아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한 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이 시련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회복과 함께 복수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통을 느끼므로,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나의 존재와 고통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비극을 모르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까? 우린 고통을 느끼고 슬퍼하기에 인간이며, 그 고통을 이기고 다시 일어남으로써 위버멘쉬(Übermensch)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니까 고통스럽다면, 불안하다면 글을 써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라. 적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불안과 염려는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할 방안을 도출하고, 그것을 실현할 때 우린 그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별한 연인에게 매달리고, 그 실연 속에서 아픔만을 느낀다고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불안함과 초조함 만으로 일을 해결한다면 세상에 불안과 초조함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해결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세상을 보라. 우린 불안과 초조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막고, 우리에게 고통을 선사하며, 감정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고통을 느낄 때, 그 고통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고통을 통해서 내가 살아남았음을 느끼고,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생각하라. 걱정과 불안의 연속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감정들을 디딤돌 삼아 일어선다면 그들은 성장의 자양분이 될 테지만, 그것들을 밟지 못한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