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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Jul 16. 2022

산토리 가쿠빈 2

좋은 게 좋은 거지

 J군은 나의 전(前) 남자 친구이며 현(現) 남편이다. 등산의 공통점을 가지고 만난 우리의 첫 데이트는 관악산이었다. 사실 그와 들머리에서 출발했을 때 비호감 관악산은 이미 호감인 J군으로 인해 아름다운 기억으로 100% 왜곡되었다. 정확히는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이 사실이되고 좋지 못한 기억이 거짓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의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나는 "등산이요."라고 늘 대답하곤 한다. 절반은 동의를 하지만 절반은 "어차피 내려올 거 뭐하러 올라가요?"라고 되물어본다. (역시 나도 속으로 '똥으로 나올 거 뭐하러 먹나요.' 라며 되받아친다.) 나는 등산을 통해 얻는 것 중 대부분은 올라가며 경험한다. 들머리에서 비포장길이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오르는 산에 대해 마음껏 상상을 하고 비포장길이 나오면 그때부터 코를 벌름 거리며 자연을 마음껏 느낀다. 평평한 1평 남짓한 공간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상상 속의 나는 이미 텐트를 치고 누워서 숲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있다. 숲을 마음껏 누리다가(계곡 소리,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 청설모, 다람쥐, 고목...) 일정 구간이 지나면 산은 갑자기 나를 꺾어 올려버리고 그때부터는 외적인 자극보다 내적인 자극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해야 할 일, 이번 주에 내가 실수한 일, 나한테 만행을 저지른 직장동료, 사표를 던지고 퇴사하는 나의 모습까지 흘러가다가 '그래 다시 한번 해보지 뭐!'하고 단단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무 사이로 풍경이 트이기 시작한다. 두 발아래로 네모나게 깍둑썰기 된 마을이라든지 지평선 너머의 바다, 길게 뻗은 강줄기가 훤히 보인다. 등산 시작 전 차에서 본 웅장한 산에 비하면 개미같이 작은 내가 이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왔다는 사실에 놀란다. 내가 굉장히 큰일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날 나와 J군의 계획은 연주대에서 하이볼(보통은 탄산수에 소량의 위스키를 섞어 마신다) 한 잔을 말아먹는 것이었다. 연주대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하이볼 제조를 위해 가방에서 플라스크에 담아온 산토리 가쿠빈과 레몬을 꺼냈다(우리는 마트에서 묶음으로 밖에 팔지 않아 레몬을 봉지째로 가지고 온 상태였다.) 그리고 탄산수를 꺼내... 야 하는데 탄산수는 어느 누구도 준비해 오지 않았고 심지어 물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우리의 체력도 함께 바닥이 났다. 집단지성(고작 머리 둘이지만)을 발휘하여 얻은 결론은 '물 대신 레몬즙'이었다. 우리는 10개의 레몬을 전부 짜내어 레몬주스를 만들었고 산토리 가쿠빈을 섞었다. 지금 생각해도 침 고이는 레시피이다. 맛의 평가는 '오히려 좋아' 아니 '이게 최고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황에 맞는 베스트 레시피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관악 하이볼'이라 명명하였다. 아찔하고 눈을 번쩍 뜨이게, 하지만 꽤나 짙은 그 맛은 꼭 대중화된 혹은 보편화된 레시피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나중에 이자카야에서 접한 두유 하이볼도 그러했다. 메뉴를 처음 봤을 때는 구역질을 했지만.)


최근에는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듣는 소리가 있다. 'X 알 못'. 상황에 따라 부르기 쉽다. 게임을 잘 모른다면 '겜 알 못', 맛있게 먹는 방법을 모른다면 '맛 알 못', 마찬가지로 술 마시는 방법을 모른다면 '술 알 못'. 술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조합과 안주가 있지만 그것은 그저 대중의 입맛에 맞는 가이드라인이 아닌가. 내 입맛이 대중적이지 않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위스키 안주로 김부각이 최고라면? 탄산수+위스키 하이볼이 아닌 레몬주스+위스키가 최고라면? 나는 어쩌면 술 알 못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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