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그리운 분 찾아드립니다.
우리 엄마는 나처럼 조신한 딸 곁에 더욱 조신한 친구들이 한동아리 모여 있는 줄 모르신다.
좌우간 갑돌이가 나이트클럽에서 밤새고 놀다가 들어와서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흘리며, 지난번에 돌아가신 영구네 아버지가 부활했다가 또 돌아가셨다고 엉너리를 쳤고, 갑순이는 그 말을 믿는, 믿을 수 없는 바보였다.
그렇다면 갑돌이가 나이트클럽에 갔었던 사실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현장에서 ‘그놈이 노는 꼬라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갑돌이는 내가 갑순이에게 이를까봐 내 술값까지 내 줬다. 뇌물을 받은 나는 갑순이에게 꼬아 바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갑돌이와 나는 서로 짬짜미 동맹을 맺었다. 서로의 미친 짓에 대해 배우자에게 함구하기로.
갑돌이는 그런 거짓말도 잘 믿어주는 갑순이와 결혼하면 세상이 지 맘대로 될 것 같아서 현모양처형인 갑순이에게 청혼을 한 모양인데, 친구 된 입장에서 그 결혼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 날짜는 아직 안 받았다기에 갑돌이에게 전화로 협박했다.
“니가 어떤 짓을 하고 다닌 줄을 내가 아는데, 감히 내 친구하고 결혼하겠다고? 이 도둑놈아 양심 좀 있어라. 안 된다. 안 돼. 강행한다면 나 머리에 띠 두르고 결혼식장 앞에 드러누워 버릴 거야.”
라고 했는데, 갑돌이가,
“내가 갑순이에게 나의 과거를 낱낱이 고백했어. 앞으로 개과천선하여 착한 남편에 자상한 아빠가 되겠다고 했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 아니냐. 임팩트있게 손가락을 단검으로 베어서 뚝뚝 떨어지는 피로 혈서를 썼그등. 그랬더니 갑순이가 쓰나미 같은 감동의 물결에 휩싸여서 나의 청혼을 받아줬어. 너, 우리 결혼에 초치기만 해봐. 피 볼 줄 알라고.”
그러면서 그놈은 내 전화를 차단하고 갑순에게도 내 전화를 차단하라 시키고, 둘은 결혼했다.
둘이 결혼하는 날, 갑돌이는 내가 훼방 놓으려 나타날까 봐, 가 아니라 전 여자 친구들이 나타나 결혼식장을 뒤엎을까봐 보안업체 가이드 일 개 중대를 배치하여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나는 친구의 결혼식장에도 못가고,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맑은 소주에 눈물이 떨어져 동심원으로 흔들리며 섞였다. 하늘처럼 맑아서 푸르게 보였던 소주가 뿌옇게 흐려졌다.
분노하여 흘리는 눈물은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에 비해 그 맛이 더 짜다고 한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수분을 과하게 증발시켜 염류의 농도가 진한 짠 눈물을 배출시킨다.
그 날 소주는 눈물보다 맑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고, 처음으로 눈물이 섞인 짜디짠 소주를 마시며 친구가 불행해 질까봐 울었다.
나는 갑돌이는 천벌을 받으라고 저주했다. 하지만 내 친구 갑순이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었다.
“갑돌이, 아니 너네 남편 바람 안 펴?”
아아, 나는 왜이리 입이 방정이란 말이냐. 왜 그런 위험한 질문을 생각도 없이 날린단 말이냐. 십 수 년 만에 일식집에서 입안에 착 감길 것 같은 생선회 몇 점과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자마자 나온 말이었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내가 뭘 알어. 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있어서. 그놈이, 아니 너네 남편이 네 속 썩이나 해서.”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아이고, 나는 또 말실수를 해버렸구나. 주워 담지도 못하고 어쩌끄나.....
“너, 거의 이십 만에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우리 장군이 아빠 너무 성실하고 얌전하고 바른 사람이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토끼 같은 새끼하고 여우같은 마누라 이외에는 없대. 자기가 딴 짓을 했으면 벼락을 맞을 꺼래.”
참으로 양처럼 순해보였던 갑순이가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남편, 헐리우드 팍을 변호한다. 사실 부부란 그렇게 내 편 한 편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람직한 아내상이다.
“그래서 헐리우드 팍, 벼락 맞았어?”
으악, 나의 혀는 왜 이렇게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날뛴단 말이냐.
말실수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물고기가 입으로 낚싯바늘을 물어 잡히듯 인간 또한 그 입이 문제로다.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튀어나오는 말, 말, 말 때문에 너무 속상해서 내 주먹으로 내 주댕이를 팍 쳤다.
벼락은 내가 맞았다. 갑순이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내 얼굴에 확 끼얹었다. 나는 소주벼락을 맞아버렸다.
“너야 말로 우리 장군이 아빠를 잘 못 알고 있어. 니가 처녀 때부터 울 남편을 짝 사랑했다면서. 아직도 좋아하니? 그래서 결혼도 반대했잖아. 나, 간다. 남의 부부사이 이간질만 하는 나압쁜년. 너는 친구도 아냐. 다시 안 만날 거야.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나압쁜년”
변명이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장군이의 엄마이자, 헐리우드 팍의 부인인 갑순이는 영원히 엑스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남겨놓고 간 소주를 잔에 따랐다. 마시려는데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나는 갑순이가 지독하게 불행하게 살 줄 알았다. 아니면 이혼을 했던지.
갑순이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녀의 불행을 위로해줘야만 할 사람은, 죽기 살기로 그녀의 결혼을 반대했으나 일구월심 잘 살기만을 빌었던, 나 밖에 없다는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혀로 핥아 보니 살짝 신맛이 난다.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산성성분이 많아져서 신맛이 난다고 한다. 나는 슬픈가? 슬퍼해야 되나?
갑순이의 결혼식날 홀로 흘린 눈물이나 오늘의 또 홀로 흘리는 눈물이나 염도는 비슷할 게다. 하지만 그날은 진짜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었다. 오늘은 기쁨의 눈물이지 싶다.
그래 잘 살아라. 너 행복하다면 나 죽는 날까지 너 안 봐도 괜찮아. 너 생각할 때마다 소주에 눈물 타서 혼술 마실게. 친구야.
사진설명:우정/사진출처:shutterstock
ps: 사실 나는 갑순이를 만나기 며칠 전 갑돌이를 만났다. 갑순이의 전화에 앞서 갑돌이의 전화가 먼저 왔었다. 미팅시각을 약속했지만 편하게 아무 때나 와도 된다는 그의 우호적인 말에 하루 전날 을지로에 나간 김에 충무로 그의 사무실에 들었다.
내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자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느글거리는 춘장 냄새를 풍기며 묘령의 여자가 내 앞을 급하게 가로질러 지나갔다.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테이블 위에는 반쯤 먹다 남긴 짜장면과 탕수육과 소주 한 병 소주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젓가락도 한 쌍이 짜장면 그릇위에 나란히 올라 앉아 있었다.
“에구 식사하시는데...”
“아뇨, 다 했어요”
오랜만에 만나니 존댓말도 쓰고.... 철이 들었나 보다. 그는 벌여놓은 음식을 주섬주섬 집어 빈 그릇 수거용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미 비닐봉지 안에는 시뻘건 입술연지가 묻은 젓가락 한 쌍, 시뻘건 입술연지가 묻은 소주잔 한 개가 들어있었다.
나는 거의 20년 만에 인사를 나누기 위해 갑돌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입술 부근에는 콜타르 같은 짜장 소스와 빨강 입술연지가 색채의 대비를 강조하며 회화적으로 묻어있었다.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뒤돌아서 사무실을 나서는 내게 헐리우드 팍이 외장쳤다.
“나, 짜장면만 먹은 거야. 너, 우리 장군이 엄마한테 허튼소리하면 가만 안둘 거야. 우리 계약 아직 유효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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