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스킹 도전기!

대중 앞에서 연주하고 노래하고 말하기

by 노이 장승진

누구나 남들 앞에 서는 것은 어렵다! 사람은 대중 앞에 설 때 가장 떨리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행복함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자신이 해 보지 않은 경험, 특히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든지, 노래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경험이다. 떨리고 긴장하고 전날 설렘으로 잠 못 자기도 한다. 물론 세월이 지나갔을 때 그때를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멋지게 무대를 장식하거나 멋진 연설을 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로망이다. 그래서 나도 노래를 잘하고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에는 매우 말을 잘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무허가 직업소개소(당시는 대부분 무허가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를 하셨다. 따라서 우리 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잘하고 칭찬도 받고 용돈도 많이 받는 재롱받는 아이였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과 말투 등으로 사림들은 전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나는 당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 좋아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너무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린 시절 나는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로부터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몇 번의 핀잔을 받기 시작하면서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사내자식이 쓸데없이 말이 많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게다기 설상가상으로 육 남매의 막내였던 나에게 그래도 항상 지지 역할을 하시던 어머니가 편찮아지시고 병환은 점점 더 심해지셔서 병석에 누워계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다음부터 점점 말이 없어져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약간 아린 듯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이었던 고학년 당시를 회상해보면 여러 가지 상념과 추억이 떠오르는다.


어렸을 때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는데 고학년이 되자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대학가인 흑석동의 부촌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자녀들의 부모는 대부분 중앙대 교수였던, 집안이 풍족한 아이들이었고, 한 명은 의사의 아들이었다. 나는 가난한 동네의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연로하지만 돈벌이를 위해 항상 바쁘셨다. 게다가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사이 아들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당뇨가 발병하여 심해지자 병석에 누워계셨기 때문에 한때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막내인 나는 자연스럽게 찬밥이 되고 점점 더 천덕꾸러기 되었다. 혼자 나 자신의 관리를 배운 적도 없었고 할 줄 몰랐던 나는 겨울 내내 세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바지 하나를 입고 다녔고 상의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대인관계에 있어서 열등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상황은 갈수록 좋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졌다. 집안의 경제상황도 점점 안 좋아지고 기울기 시작했다. 형과 누나는 독립하여 돈을 벌러 갔고, 아버지가 도맡아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셨지만 점점 더 지쳐가시는 모습이었고, 종국에는 화를 많이 내시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는 여러 가지 하셨지만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그나마 아버지가 완전히 경제생활을 접으시자 생활면에서 많이 궁색함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일찍 진출하여 생활비를 보태기 시작했던 작은 누나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냈고, 막내인 나에게는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외롭고 친구도 없었고 그냥 점점 더 우울해 지기만 했다. 당시 학생 시절 교회에 같이 다니던 여학생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던 나는 그 여학생을 볼 때만 행복감을 느꼈다. 스스로는 멋을 전혀 부릴 줄 몰랐고, 병석에 누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음에 따라 학교와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옷차림도 남루해지고 극도로 기가 죽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해 돌보고 보살피는 방법을 몰랐다. 용돈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나의 운명은 정말 침체되고 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한 우울한 상황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직장에 가서도 우울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해금 연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소리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소리가 구슬프고 나의 정서에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치료적 효과가 있는 현악기인 해금을 구입해서 나 자신을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악기인 해금을 구입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한 것이 나의 첫 번째 악인 해금이었다. 해금은 두줄로 만들어져 있어 조율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초보일 때는 그 소리가 듣기가 불편하다. 해금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결혼해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해금연주 연습은 시끄럽고 소음이라고 비난을 많이 받았다. 제발 다른 곳에서 해금 연습을 하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 거기다가 나의 왼손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펴지지 않아서 현을 제대로 잡아서 멜로디를 제대로 내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 좋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과감하게 사람들을 위하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요양원을 방문하여 어르신들을 위하여 연주와 노래를 시작했다. 거동을 못하시는 분들, 누워만 계시는 분들이 누워서 박수를 치시며 좋아하실 때 나는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버스킹에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거리공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팁박스도 준비했다. 용산전자상가에 소형 앰프도 사고 마이크도 샀다. 나는 연주에 지나가는 분들이 좋아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의아해하는 분들도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나의 연주 실력과 상관없이 팁박스에 돈이 수북하게 모여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돈은 반드시 남을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주말마다 한강공원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면서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공연 멘트였다. 나는 공연 멘트도 연습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해금연주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금연주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나는 실력 있는 해금 연주가가 되었을 까? 정답은 아니다. 해금연주를 한 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나 아직도 남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먼 수준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력하고 있으나 재능의 문제, 그리고 지도해주셨던 스승님이 이사 감으로 스승님의 부재 등으로 그렇게 실력의 진전이 많이 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지속적으로 해 나갔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복지시설은 거의 안 가본 시설이 별로 없었다. 주로 시설의 장애인, 어르신들 앞에서 해금연주를 하기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나는 그동안의 공연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노래요, 음악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공연 대본이요, 시나리오인 것이다. 말하는 요령도 나름 조금은 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다.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듯이 하면 나 자신도 모르게 말이 술술 잘 나온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강조하는 단어도 생기고 장음과 단음을 구별하고 자연스러운 억양도 생긴다.


벙어리가 말문이 트이듯이 이제 나의 표현력이 향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봄의 공원 무대 위에서 멋지게 버스킹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버스킹을 통한 악기, 노래, 멘트 등 표현력의 향상에 비례하여 나의 인생도 점점 더 꽃을 활짝 피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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