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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kingmom B Mar 10. 2023

직장인의 물

직장인의 성수, 커피에 대해

 아침이면 왜 늘 피곤한걸까. 생각해보면 일어나서 개운하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한 달에 며칠 되지 않는다. 두뇌 맑음 그래프는 항상 아침에 가장 낮은 곳에서 점심 이전에 살짝 높은 곳을 향했다가 식곤증으로 헤매는 오후에 좀 쳐졌다가 퇴근 이후 가장 정점을 찍는다. 퇴근 이후 맑은 정신을 왜 아침에는 가질 수 없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대를 마신, 아니 때려마신다. 그대의 이름은 직장인의 성스러운 물, 커피!




추억의 커피


 내가 갓 입사했을 시절만 해도 믹스 커피가 대세였다. 내가 취업준비생 시절, 여자들에게 단골 질문인 "만약 상사가 커피 심부름을 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꼭 준비해야 할 필수 질문일 정도로 '커피를 타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면서도 서로 시키면 껄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출근하는 아침이면 항상 향긋한 믹스커피 냄새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손님이 오면 믹스커피를 타서 내놓는 걸 부끄러워 하거나 촌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부장님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직원들도 믹스 커피를 애용했다. 입사 초기 업무를 알려주던 언니가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나에게 '넌 아직 어려 쓴 커피맛을 모르는구나' 하는 눈빛을 쏘며 "너도 곧 믹스커피의 맛을 알게 될거야."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안타깝게도 아직 믹스커피의 달달 쌉쌀한 맛은 알지 못하지만 세상의 쓴 맛은 이제 조금은 봤다고나 할까. 그래서 쓰고 쓴 커피가 좋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 회사에 믹스커피를 구비해두지 않는다. 회사에서 구비하는 품목은 일반 차와 인스턴트 블랙 커피뿐이다. 믹스커피는 역사적 산물이 되어 버린 듯 하다. 마치 이메일로 팩스가 거의 멸종해버린 것처럼.




커피 취향을 안다는 것


 요즘 같으면 카페와 커피가 없는 세상이 존재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을 나서면 세발자국마다 하나씩 있는 카페가 즐비해서 원하는 가격대에 원하는 취향의 커피를 언제든 골라 마실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점심시간이면 그 많은 카페에 대체로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요즘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밥을 먹은 느낌이 들 정도다. 


 커피 메뉴를 고르다 보면 약간의 취향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하면 '칼로리 신경을 쓰는구나'하는 관리하는 느낌을 주며, 라떼를 시키면 '배가 좀 덜 찼나' 싶기도 하다. 당최 단 걸 잘 시키지 않는 동료가 바닐라 라떼를 시키면 '오늘 기분 안좋은 일이 있었나? 당충전할 일이 있나?'하고 짐작해보기도 한다.


 직장동료 사이라면 서로의 커피 취향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예전 믹스커피 시절에는 커피 : 설탕 : 프림의 비율을 아는 것이 서로에 대한 관심의 척도였다고 하면 요즘은 좋아하는 커피 메뉴를 아는 것이 둘 사이의 거리를 표현해준다. 




커피 한 잔 하자!


 팀장님이 갑자기 부르신다.

 "B과장, 커피 한 잔 하자!"

 직장인이라면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에 담긴 이중적 의미로 인해 긴장하기 마련이다. 꾸중이냐, 진지한 대화의 수순이냐의 갈림길에서 덜컥 겁을 집어먹는다. 다행히도 팀장님은 얼마 전 나왔던 감사 결과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 날 호출하셨다. 오늘은 잘 넘어갔다. 어제 메일 잘 못 나간 거 확인하셔서 부른 줄 알았는데 그건 모르셨나보다. 다행이다.

 

"A매니저,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후배가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알면서도 호출을 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영락없는 꼰대다. 

 "어제까지 해야하는 보고서 다 작성했어? 취합해야 하는데 A매니저 분량만 빠져있어."

 A매니저는 잔뜩 긴장한 듯 소 눈을 꿈뻑거린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녀석은 아직도 다 작성을 마치지 못한 모양이다.

 "일단 커피부터 한 잔 해! (나의 잔소리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술 없이 인생을 논하기 힘들다는 사람처럼 나는 커피 없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을 잊었다.


 

 어김없이 아침이 오고 다시 커피를 내리면 하루가 시작된다. 커피를 내리면서 기도한다. 오늘 하루 또 무사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날이 오길. 늘 웃으면서 보낼 순 없어도 찡그리는 것보다는 웃는 일이 많은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다 내린 커피를 한 모금 하고 다시 일하러 간다. 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무심히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커피를 들이킨다. 오늘 하루,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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