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도 크고 잘 생기긴 네가
“여기서 상담 신청하면 되나요?” 라고 물었을 때
“진로상담 신청하려고 하는 거야?” 라고 말했지.
고민은 1도 없을 것만 같은 얼굴로 공손하게 인사한 네가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궁금했어.
소중했던 관계가 끝이 나고
상처입은 마음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너는
살이 잘린 듯한 아픔의 시간을 잘 이겨냈지만
알 수 없는 감정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엉켜버린 실뭉치가 되어서 네 마음을 힘들게 했어.
압도될 것 같은 감정을 안전하게 마주했고
조각 조각 흩어지고 엉켜버린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했어.
잘못된 생각과 판단은 반박했고
어쩔 수 없는, 가장 최선의 선택에는 힘을 실어주었으며
후회되는 행동은 변화를 위한 기회로 삼기로 했어.
복잡한 마음과 생각이 조금은 정리되길 바라며
종이 위에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씩 써내려갔지.
언젠가는 네 조각들이 모자이크 그림처럼 하나의 작품이 되어
훗날 그 작품을 꺼내 보았을 때
아팠지만 성장했다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해봐.
상담실에 찾아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끔은 고통을 준 ‘사건’ 자체보다
사건으로 인해 자신-환경-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모른채,
그 때 그 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을 여기 저기 널브러트리고 혼란스러워 한다.
나는, 그런 학생들과 마주 앉아 널브러진 조각들을 정리하곤 한다.
그렇게 조각들이 모이면
고통의 상황에 대해 '한 줄 정리'를 한다. 그 한줄 정리가 완성되면 상담은 끝이 난다.
고통의 조각들이 연결된 한줄을 나는 '마침표'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불쑥 떠오를 생각과 감정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한 줄이 있을 때
혼란스러움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이라 믿는다.
혼돈스럽다며 상담실에 온 너는
소중했던 관계가 깨진 후
밀려오는 슬픔과 그리움, 허전함을 느끼기 싫어 그것들을 모른척하며 넘겼지만
모든 상황에서 '네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미안하다고 말했던 시간들이 불쑥 떠올라 억울함과 죄책감, 앞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란 불안에 압도당했다.
불편한 감정들을 처리하는 것으로도 힘든 시간들인데
초라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깊은 곳에 숨어있던 과거의 자신이 매일같이 찾아와 악담을 퍼부었고
- 넌 역시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행복해 질 자격이 없어. -
지금까지 공부를 잘 하게 했던 조금은 강박적이고 매서운 초자아는 스스로를 모질게 채찍질했다.
-그딴 걸로 힘들면 안 되지. 힘들다고 축 처진 모습은 꼴도 보기 싫다고.-
종이 한 장에, 조각난 생각과 감정들을 적어갔다.
짧은 단어들로 적힌 ‘조각’들 옆으로
따뜻한 너의 말을 적었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너의 말도 적었으며
어른으로서, 상담가로서 해줄 수 있는 나의 말도 적었다.
그렇게 종이가 점점 채워져 갔고
종이 한 켠에
단단하고 품이 넓은 모습을 인정하며
자신을 믿고 행동하기를 다짐하는 말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물었다.
-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행복을 포기할 거야? 아니면, 행복을 느끼기 위해 고통도 기꺼이 경험할 거야?
찬찬히 생각한 너는 말했다.
-후자요.
행복한 시간들 속에서 불안하고 상처받았던 자신에게
왜 그 시간을 계속 버텼냐고 몰아붙인 자신에게
‘괜찮은 선택이었어.’ 라고 말해준 너는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가고 난 후
고통이 싫어 행복을 포기했던 내가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 너의 선택이 틀렸고, 너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야. -
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 괜찮아. 그 선택이 틀렸다 해도, 너는 지금 충분히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어.-
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 만큼 사랑하지 않았던 거라고
상대를 향한 사랑보다, 나를 향한 사랑이 좀 더 컸을 뿐이라며
합리화인지 사실인지 모를 말로 마침표를 찍었던 그 때가
후회되는 것일까.
언젠가는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행복을 선택할 나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