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우던 엄마였다.
반질반질하게 니스를 바른 누런 바닥 위에 동그랗고 작은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엄마는 일본어 책을 폈다.
그리고, 그 옆에 나와 동생은 앉아 엄마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전혀 모르는 글씨들이 정갈하게 쓰여있었고, 엄마는 일어 밑에 쓰인 한국어 발음을 따라 하며 연습 중인 엄마는 꽤나 고무되어 있어 보였다.
"엄마 일본어 하는 것 들어볼래? 오하요 고자이마쓰!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엄마는 웃으며 책에 밑줄과 별표까지 그리며 공부했다.
장사를 시작한 지 일 년여 쯤이 되자 엄마는 외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유은 즉슨, 중국에서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현지인 가이드와 늘 함께 다니며 물건을 사곤 했는데, 그분은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지만 엄마는 아예 알아듣지 못했기 때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가끔은 사기(?)를 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거래처를 매우 신뢰하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워놓으면 거래도 더욱 수월하고 가격 흥정도 잘 될 것이라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엄마는 틈날 때마다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을 한 달에 두세 번씩 왔다 갔다 했다. 장사를 하는 인사동에는 일본 관광객이 많았으므로 엄마는 역시 일본어도 같은 시기에 배우며 장사를 준비해 나갔다.
이꾸라 델까, (얼마인가요)라는 말은 수십 년 후에도 내 머릿속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엄마는 열심히 공부했고, 우리 자매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언어공부 노트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꼼꼼하게 정말 많은 양이 써져 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사는 것도 아닌데 공부를 왜 하는 건지..라고 생각했던 9살의 나였지만, 점차 엄마의 모습을 보며 공부의 재미와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엄마가 가르쳐준 것은 비단 언어 배우기 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할 때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 장사치로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고객과 더 소통하면서 장사를 할지, 그리고 거래처를 뚫고 신뢰를 쌓는 모습까지, 엄마는 내게 늘 배움을 지향하는 여자로 남아있다.
그리고 결국 엄마는 칭화대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2년 후 학위를 따게 된다. 대학원 조찬을 간다며 신나 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엄마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5년 후의 일이었다.
칭화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 어디 있는지 잘 몰랐지만 엄마가 공부의 결실로 어떻게 코스를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는지, 나는 엄마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삼개국어를 원하던 엄마는 우리에게 영어를 무척이나 가르치고 싶어 하셨고, 기회가 생기자 우리 자매를 유학 보내시며 꿈을 이뤘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유학생처럼 영어를 그저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공부에 열중하기보다 쇼핑이나 먹으러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엄마 덕분에 나도 밤새도록 공부하는 재미를 배웠노라,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어릴 때 접한 것이 우리에게 정말 좋은 선례였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