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D"라는 말을 엄마가게에서 배우다.
엄마가 인사동 길거리에서 물건을 늘어놓고 팔다가 삼성동 코엑스에 삼일에 4000만 원짜리 부스를 빌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년 남짓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남의 가게 앞에서 하던 소품 장사대신, 가구를 사기 시작했다. 그즈음 '중국 고가구'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뛰어난 엄마는 중국에서, 한국 등지에서 고가구를 모아 팔기 시작하였는데, 어린 내 눈에는 전-혀 매력적이여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가 사는 집에 부엌 식탁 하나를 가져왔는데, 어두운 갈색의 투박한 디자인의 직사각형의 식탁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불편한, 쿠션도 하나 없는 식탁 의자 6개를 들여놨다. 너무 불편해서 엄마 이건 왜 바꿨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너무 바빠 얼굴 못 본 지 이미 한참이었다. 엄마의 장사가 대성하고 내 용돈이 오르고 가진 물건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엄마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중학교 내내 일대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우리를 돌봐주고 어여삐 여겨 오신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매일 오시며 엄마대신의 역할을 해주셨다. 엄마를 엄마처럼 어린 나이에 낳으신 할머니는 젊으셔서 그런지 아직 에너지가 넘치셨고, 우리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관리해 주시고 늘 함께 있어주셨다. 그런 할머니 덕인지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잘 못 느끼며 자라났다.
점점 장사가 잘 되어가는 엄마의 소식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고소영, 오연수 배우의 인터뷰 내용을 오렸었지만, 우리 할머니는 신문에 나온 엄마의 사진과 이야기를 부엌가위로 슥슥 오리며 "느이 엄마 좀 봐라. 을마나 대단하냐. 거미 같은 거 불쌍한데 엄마한테 잘해라..." 엄마를 대단하다고 하면서 왜 엄마가 불쌍하다고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나이가 엄마와 같이 30대 중반이 되자 어렴풋이 느껴질 때도 있다. 엄마가 여자 혼자 몸으로 그 사업을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었을지 말이다.
어찌 됐던 엄마는 5년 안에 코엑스에서 하는 가구 박람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부스를 설치하기 전날인가에 나를 데리고 갔던 거 같다. 그리고 그날 보여주는 공간이 삼일에 사천만 원짜리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의 사천만 원. 나로서는 그 큰돈의 가치를 모르기에 허공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단하네-라고 읊조렸다. 엄마는 내게 페어기간 동안 나와서 엄마 부스에서 소품 파는 것을 용돈 줄 테니 도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페어에 도착한 나는 사실 깜짝 놀랐다. 비었던 그 부스가 맞는 건가?
부스에는 정말 빽빽하게 가구가 놓여있었는데, 세단을 천장까지 쌓은 가구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가구들을 여기에 가져온 엄마가 대단하고 의심도 들었다. 이건 전시를 위한 건가 팔기 위한 걸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가, 사람들은 인산인해로 정신없이 몰려들었고, 그 많은 가구들에게는 빠른 속도로 SOLD 하는 태그가 붙여지게 되었다. 엄마의 글씨였다. 엄마는 페어에 머물며 직원들과 가구를 팔았고, 검은 사인펜으로 솔드를 적었다. 정확히 삼 일 후 페어가 끝날즈음에 장사는 기염을 토하며, 99프로의 가구들에는 태그가 대롱대롱 달리게 되었다. 내가 팔던 작은 물고기 소품도 하나에 2000원이었는데 가감 없이 1000개는 팔은 것 같다.
결과는 말 그대로 "솔드아웃". 4천만 원의 페어에서 거의 2억이 가까운 매출을 달성한 엄마의 의기양양한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박수를 쳤다. 대단하네. 엄마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