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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마스쿠스 Oct 29. 2024

4.2 학점 포기

번아웃 후에 찾아오는 것들

유럽과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피렌체는, 걸어서 한 시간- 한 시간 반이면 도시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걸어서 도착할 수 있을 만큼의 작고 정겨운 도시다.


테라꼬따 색깔이 도시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도시 미관을 생각하여 색깔을 정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 도시는 꼭 흙으로 빚어놓은 것처럼 정적이고 따뜻한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도시를 가르듯 흐르는 아르노 강은 몇천만 명은 건넜을 아름답고 오래된 다리들을 통해 건널 수 있다.


오래된 도시의 아름답고 완벽한 날씨에 사로잡힌 나는 바로 이태리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학교 수업도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만 이루어졌고, 내가 21학점을 꽉 채워 다녔던 뉴욕의 생활과는 정반대로, 하루에 두 개의 수업을 아침, 오후에 들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교수님들도 확실히 뉴욕에서 만났던 교수님들과 분위기나 가르침 방식이 달랐다.



"이번작품은 점수를 주지 않겠어."


드레이핑 교수님은 스위스 분으로,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는 50대 후반의 여교수님이다.

이 학교에서 이태리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로 우리도 가르치셨는데, 그 수업 수준이 아주 높다고 들었다.


교수님은 백발이 성성하셨는데, 딱 부러지는 발음, 완벽한 숙련도, 아름다운 곡선의 카울넥 드레이핑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알려주셨다.


1학년때 배운 수업들에서는 처음의 기초를 배우며 기본적인 옷들의 봉제와 드레이핑을 배웠다면, 2학년 1학기의 수업을 좀 더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하는 법을 배우는 교과수업이었는데, 아차...


나는 잘 다루어 보지 않은 부드러운 천을 사용한 디자인의 "디" 자도 모르는 학생이었던 것.


그래서 10번 이상 천을 다시 잘라가며 연습을 했지만 당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 아이디어도 안 떠오르고, 감을 전혀 잡지 못했다.


지금처럼 스마트 폰이 있으면 검색이라도 해볼 텐데...

당시의 나는 이태리에서 구한 전화와 문자만 되는, 인터넷이 안 되는 2G 폰 밖에 없기에, 뭘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결국 과제를 내면서 설명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지고 손이 달달 떨리며, 나... 잘 못한 것 같다고 교수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교수님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작업 과정은 다 지켜봤는데 이해를 못 한 거 같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있는 일" 이야.

이번 점수는 주지 않고, 없는 셈 치겠어.

평균에 넣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과제 때문에 성적 떨어지지 않으니 걱정 말고, 다음 과제 잘해봐.

인생에 이런 일도 있단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 걱정하지 마. 고개 들어!"


교수님은 뉴욕이었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든 기회라는 것은 있어야 한다며...


나는, 얼어붙어 어버버 한 채로 내 자리를 떠나 다른 작품을 평가하러 가신 교수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교수님은 하던 일을 하셨지만 내 마음에는 큰 파장이 일었다.


그래. 나도 이런 가르침을 본받아, 안 되는 것은 놓고, 새로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자.

너무 집착하지 않고, 놓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서 안 되는 것을 찾기보다는 되는 것을 바라보는 눈을 갖자.


세상에서 처음으로 배운 유럽감성의 교육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 늘 겪은 경쟁과, 우위를 놓고 겪는 긴장감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디자인을 할 때 상업적인 시선보다는 예술로 받아들였다.

 

전 과목에서 최고점을 받아야만 하던 강박을 놓고,

창문을 연채 투스카니의 하늘을 보며, 와인을 작은 잔에 따라 마셨다.

그 상태에서 디자인을 저녁노을을 보며 하고, 이탈리안 가요를 들으며 옷비즈를 바느질하며, 밤을 지새웠다.


학점을 포기하고, 나만의 디자인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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