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한옥마을에서 진관사 입석이 있는 백초월길을 따라 북한산의 공룡능선이라 불리는 의상능선과 기암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가면진관사태극기 표지석이 나온다. 들머리에 들어서자 계곡에서 박새가 지저귀고 물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진다. 계곡 풍경을 눈에 담고 마음에도담는다.
철제 홍예문 종도리에는 ‘종교를 넘어’, ‘마음의 정원’ 팻말이 매달려 있어 이곳이 서울의 쉼표, 사색의 공간인가 보다. 게다가 머루 덩굴이 지붕을 덮어 그늘막에다 시원한 솔바람까지 불어오니 발걸음도가볍다.
홍예 덩굴을 지나자 ‘극락교’ 다리와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현판이 보인다. 극락교에서 이정표는 오른쪽으로 가면 진관사 계곡과 향로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비봉과 사모바위로 가는 등산로라고 안내한다.
오른쪽 계곡 길을 따라가면서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니아낙 서넛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무엇이 그리 즐거운지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향로봉 이정표를 지나자 5층 석탑이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석탑은 금강송 몇 그루와 어울려 한층 더 장엄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송림과 석탑을 마음에 새기고 계곡 여울에 얼굴도비춰보고 세심교 돌다리를 건넌다. 세심교 다리 위에서더럽혀진 마음을 씻고,절간 돌담을 끼고 성긴 돌이 박힌 계곡길을 따라 오른다.
물줄기는반석을 타고 여울로 떨어지고, 여울에는 하얀 거품이 일고 물가엔 물비늘이 반짝거린다.
계곡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물장구치는 아이, 폭포에 몸을 맡긴 아낙, 발을 담그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청춘, 대놓고 담에서 알탕을 즐기는 아재도 있다.
진관사 계곡의 백미는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와 넓은 담과 소용돌이치는 여울이다. 가히 요란스럽지도 얌전하지도 않다. 가파른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 물길이 너럭바위를 타고 담에서 힘을 모은다.
그 힘을 모두 폭포에서 쏟아붓는다. 쏟아지는 물줄기는,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른 아낙이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베틀 앞에 앉아씨줄과 날줄을 엮어가는 것처럼, 만났다 멀어졌다 한다.
바닥의 자갈과 돌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쪽빛 담에는 버들치 떼가 유유히헤엄치며노닐다가나그네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죄다 흩어진다.
(진관사 계곡 작은 폭포와 담)
물가 댓돌에 자리를 깔고 앉아 마음의 정원에서 습작노트와책을 펼친다. 나들이 나온 형제자매는 다음엔 등산을 가자는 둥, 서늘한 바람이 불면 가자는 둥, 우기다가 369게임을 시작한다. “낄낄”, “깔깔” 웃고 떠들다 “오빠는 그런 소리 하지 마!”하고 여동생이 핀잔을 준다. “누나도 그러더라.”하며 오빠는 되려 큰소리친다.
청춘 커플은서로 물을 목덜미에끼얹어준다. 느닷없이 남자 친구가 물장난을 치자 여자 친구가 물폭탄 세례를 퍼붓는다. 남자 친구는 “항복! 항복!”하고 엄살을 떤다. 해는 중천을 지나 계곡에 그늘막이 내려오고 땀이 식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하산하는 길에 진관사 부처님이나 만나보고 가야겠다.
진관사 인문학 탐사
예로부터 한양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서쪽은 진관사라 했다.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중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숨겨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칠성각 앞에서 비구니 스님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자랑스럽게 해설을 한다.
대웅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솔바람과 어울려 여운을 남긴다. 연꽃을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는 불상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마당에 석탑이 서 있는 게 아니라 불상이 서 있는 게 신기해서 스님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비구니 스님은 중생들을 데리고 사찰 자랑질하기에 분주하다.
절간 해탈문 산기슭은 노송이 빽빽한 송림이고 언덕엔 마애 아미타좌불이 모셔져 있다. 솔밭에는 곱슬곱슬한 잔디가 비단이불처럼 덮여 있고, 맷돌을 두 줄로 가지런히 놓아 밟고 지나가기에도 아깝다.
마애불을 지나자 한글길 표지석이 나온다. ‘진관사 사가독서터’ 안내문에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절에서 독서를 하게 했는데, 백팽년·성삼문·신숙주·이개·하위지 등이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다고 한다. 이곳은 선비들의 별서이자 독서실이었던 셈이다.
향나무를 에워싼 능소화 꽃잎은 무심히 간들거린다. 극락교를 건너면 다시 속세로 돌아가게 된다.
바위턱에 걸터앉아 진관사를 바라본다. 천년의 향기가 가득한 고찰 진관사는 수륙재(水陸齋)로 유명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진관사에 수륙사를 짓고 국행 수륙재를 지내게 했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천도 의식으로 49일 동안 7재를 봉행한다. 조선 왕조 개국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과 정몽주, 공양왕 등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태조는 진관사를 수륙재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지은 죄를 씻고 싶은 마음이야 무지렁이 백성이나 왕후장상이나,사람 마음이 어찌다르겠는가!
(진관사 대웅전)
태종 이방원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태종의 넷째 아들인 왕자 성령대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면서 조선 왕실은 진관사를 중심으로 한 수륙재를 계속하였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상소에 의해 수륙재가 국행으로 금지되었다.
수륙재는민간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국가무형무화재로서매년 가을에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봉행한다. 절간 음식과 떡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불경이 적힌 수많은 깃발과 스님들의 바라춤으로 영혼들을 달래는 7재를 시작한다.저들의영혼이 부처님의 나라에서 극락왕생하기를 빌며 합장한다.
사생아로태어난 고려 현종
고려 현종은 한국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유일한 군주이다. 즉위 전의 봉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다.
그는 신혈사(神穴寺, 진관사의 전신)에서 죽을 뻔했다. 어린 시절 신혈사 승려로 있었는데, 그의 이모인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여러 번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신혈사 진관 스님이 법당 본존불 밑에 굴을 파고 당시 12세의 어린 왕자였던 대량원군을 숨겨주어 스님의 기지에 의해 그는 구사일생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 대량원군은 강조의 정변(康兆의 政變)에 의해 고려 제8대 왕으로 옹립되었으며, 그가 현종이다.
현종은 목숨을 구해준 진관스님에게 절을 중창해주고, 사찰 이름을 진관사라 부르게 했다. 현종은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17대 인종 때까지 132년에 걸친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고려 황실이 현종의 후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현종은 고려 왕조의 중흥지주에 해당한다.
고려 경종에게는 네 명의 왕비가 있었다. 셋째 왕비가 천추태후로 유명한 헌애왕후이고, 넷째 왕비가 천추태후의 여동생이자 현종을 낳은 헌정왕후이다. 경종이 죽은 후, 헌정왕후가 사저에 나가 살면서 그녀의 삼촌인 왕욱과 정을 통하여 나은 아들이 현종이며, 현종은 태조 왕건의 친손자이다.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수렴청정을 자처하며 천추전에 거주하면서 자신을 천추태후라 칭하게 하였다.
목종이 후사가 없이 죽은 후, 천추태후는 연인 김치양과 사통으로 낳은 자기 자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신혈사에 승려로 있던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다. 헌정왕후와 천추태후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낳은 걸 보면, 고려는 남녀 간의 사랑이 자유로웠던 모양이다.
(진관사 계곡 너머 석탑과 소나무)
고려 현종과 관련된 꿈과 야사가 전해오고 있다. 헌정왕후가 경종과 사별하고 왕욱과 만나기 전,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 소변을 누었더니 온 나라에 흘러넘쳐 모조리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해몽해 보았더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질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대량원군이 신혈사 승려로 오게 된 날 밤에 신혈사의 한 승려도 꿈을 꾸었다. 꿈속에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량원군이 어느 날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고 술사(術士)에게 물었더니, “닭울음은 꼬끼요(鷄鳴高貴位),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 어근당(砧響御近當) 하니, 이 꿈은 왕위에 오를 징조이다”라고 속담으로 해몽하였다는 야사도 전해온다.
현종이 신혈사에 승려로 있을 때, 지은 ‘시냇물(溪水)’과 ‘작은 뱀(小蛇)’ 시를 여기 소개한다. 시의 행간에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는나중에고려의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