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리구라스 군락지를 걷는 고라파니.
반단티 – 고라파니(1박) - (푼힐) - 고라파니 – 데우랄리(차 한잔) – 반단티(점심) - 타다파니 – 츄일레
(2박)
히말라야를 떠올리면 만년설 덮인 거대한 봉우리가 자연 연상된다. 그러다 보니 인식적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준비하면서 내 머릿속의 걱정이나 주변의 우려는, 추운데 어떻게 고생을 안 하게 준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네팔이 위도상 우리나라보다 10도는 아래 위치한 아열대 기후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간혹 잊을 때가 있다.
사람들의 인식적 오류가 나타나는 방식과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선택적 인식의 오류는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경험하게 되는 오류 유형이다.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흰색과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각각 팀을 이뤄 농구를 하는 동영상을 보며, 흰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공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세도록 하는 인지심리학자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사이먼스(Daniel Simons)의 유명한 실험에서 많은 참가자들은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등장하여 카메라를 보고 가슴을 친 후 사라지는 장면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패스에 집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선택적 주의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인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이나 인식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월 초 도착한 네팔은 낮 기온이 27~8도나 되는 여름의 문턱에 와 있었다. 이 시기가 아니라도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산행은, 머릿속에는 설산을 담고 있지만 몸과 발은 푸른 숲길을 지나고 있다.
출발하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꽃나무들은 점점 온 산을 온통 꽃으로 덮고 은은한 향을 뿌려대고 있다.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다.
랄리구라스는 7가지 색의 꽃이 있다고 가이드 시바가 알려 주는 데, 붉은색 꽃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지만 색이 옅은 핑크색도 섞여 있고 드물게 흰색 꽃도 보인다.
오래된 나무의 장대한 꽃 숲을 걷고 있자니 점점 행복감이 차오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도 걷기에 좋을 만큼 무난한 오르막인 데다가 꽃들을 품은 나무들의 우람하고 원시적인 자태와 이를 안은 계곡의 장대함이 더해져 신들의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환상적 느낌을 자아낸다.
이때는 이런 멋진 광경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고라파니를 가는 이 길이 유명한 랄리구라스 군락 생태계라는 것은 다음 날 이후 랄리구라스가 잘 보이지 않는 곳을 걸으면서 알게 된다.
시작부터의 이런 행복감은 고산을 간다는 두려움과 경계심을 살짝 누그러뜨리고 산에 대한 친밀감을 높여준다. 날이 맑은 편인데도 안개 낀 것 비슷한 뿌연 기운이 산을 두르고 있어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사진이 이 풍경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고라파니에 도착을 해서 찾아 올라간 롯지는 예상했던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외관이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연상시키는 멋진 모습을 지녔다. 트래킹 중에 이용한 롯지 중에서 단연 가장 멋진 모습이었다.
로비 겸 다이닝 룸의 공간에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다.
인원수 많은 한국산악회팀이 자리를 한 공간은 상당히 소란스럽다. 이미 한 차례 다른 팀들의 항의를 받은 듯 목소리가 높아지는 남성들의 대화를 옆에서 동료들이 자제시키기도 하지만 단체 등반의 흥겨움이 좀처럼 줄지는 않아 다른 팀들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
난로 가까이에 둘러앉아 있다 보니 의도치 않게 대화 내용을 듣게 되는데, 마침 오늘이 국회의원 선거일이라 이에 대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패배를 우려하며 걱정하고 분노하는 분위기가 읽혀 말을 섞기가 꺼려진다.
아침부터 같이 움직여 조금 친해진 느낌의 일행과 눈짓을 하여 따로 떨어진 자리로 이동하여 맥주를 한 잔 하며 어떻게 히말라야 올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다음 일정은 뭔 지 등을 이야기하다 보니 관심사나 생활 지역이 겹치기도 해 기분 좋게 대화가 이어진다.
창문 밖으로 비가 요란스레 떨어진다.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 기온이 차갑게 느껴진다. 고라파니가 2860m이라니 밤에는 좀 따뜻하게 입고 자야겠다.
내일은 일출을 보러 새벽에 푼힐(3210m)에 오른다. 날이 활짝 개여 좋은 전망을 보여주길 빌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마스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