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새벽 공기가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지도 스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전달할 내용이 있습니다. 잠시 모여서 듣고 가세요." 스님의 목소리는 늘 차분하고 따뜻했지만, 그날따라 그 말이 내 마음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내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벗고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템플스테이에서 제공한 공용 옷을 입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내 모습. 그리고 한 번도 예불에 참여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며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큰일 났다, 분명히 크게 혼날 거야.’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심장은 마구 뛰기 시작했고, 불안이 나를 휘감았다.
그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 잘못한 게 없어. 규칙을 안내받지 못했잖아. 만약 템플스테이 담당자가 규칙을 알려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결국 이 모든 건 내 잘못이 아니라, 나에게 규칙을 알려주지 않은 템플스테이 담당자의 잘못이야.'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라는 것을.
아론 벡이라는 심리학자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탓하거나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개인화'라는 사고에 빠진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나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습관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긴장과 불안을 느꼈고, 그것이 다시 나를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로 '알아차림'이었다. 내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을 잠시 멈추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감정은 뭐지?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객관적인 사실들이 밀려들어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 나를 혼내거나 탓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누군가에게 혼날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이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이성적인 사고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 오늘은 신부님이 떠나시는 날이구나. 스님께서 말씀하신 전달 사항도 그와 관련된 것이겠지.'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니, 더 많은 사실이 보였다. 생각의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마치 흐릿하던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경직된 사고는 마치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사고에 빠지면 불안이 밀려오고, 그 불안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나를 다시 일깨웠다. 방어기제는 그 본능의 일환이었지만,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릴 때 형성된 방어기제는 이제는 어른이 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혼날 만큼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의 방어기제는 합리화였다. 불안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며 잠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님을 알았다. 나의 생물학적 나이는 성인이 되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혼나는 것이 두려운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내 안의 불안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지도 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오늘은 신부님께서 함께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여기서 만난 것도 소중한 인연이죠. 점심 식사 후에 떠나신다고 하니, 작별인사 하실 분들은 미리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스크 착용 부탁드립니다."
내가 걱정했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혼자서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했다.'알아차림'으로 감정의 움직임을 인식하여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이 과정이 나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불필요한 걱정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