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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Apr 22. 2024

공유의 가치, 미래를 그리다

- 바움슐라거 에벨레, 오스트리아 루스테나우 <2226 빌딩>, 2013

취향의 공유, 2226 빌딩

“멋있지? 나도 이 건축물 좋아해.”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난 고개를 젖힌 채 빌딩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긋난 세로선이 거침없이 공중을 타고 오르는 듯한, 묘한 실루엣의 건축물이다. 누군가 말을 걸기에 돌아보니 캐주얼한 차림의 장년 남성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이고 다시 건축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곁에서 잠시 머물러 함께 건축물을 바라본다. 미술관에서 벽에 걸린 유화 한 점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우린 잠시 각자의 명상에 빠졌다.


“안에 들어가 봐. 1층은 갤러리야. 내 작품도 전시해놓았고.”

“어?! 들어가도 돼요? 당신, 아티스트예요? 와, 멋지다. 고마워요.”

개인 소유의 건물인 줄 알고 들어가 볼 생각은 못한 채 난 멀찌감치 건축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심히 건축물을 관찰하던 내 모습을 보고 그가 말을 건넨 것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듯 기뻤다. 저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다니, 그가 예술가라니, 그런 이와 작품으로서의 건축물을 함께 봤다니. 그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니. 짜릿함이 단번에 몰려들었다.


문이 열리며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와다다 달려와 남자에게 안겼다. 딸을 덥석 안아 뽀뽀를 해주는 아빠의 모습이 사진 한 컷처럼 눈에 담겼다. 늘씬한 몸매의 아내는 아들의 손을 잡고 유유히 걸어와 남편의 곁에 섰다. 건축물을 가리키며 아내에게 독일어로 말하는 남편, 아마도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 말하는 듯했다. 아내는 나와 건축물을 번갈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내게 행복한 하루를 보내라며 인사하고 떠나던 그들의 뒷모습이 봄날처럼 화사했다.


이같은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건축물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말을 걸어오고 함께 그것을 감상하는 상황이. 비슷한 상황을 몇 차례 겪다 보니 알게 됐다. 이들에게는 이런 게 일상이구나. 건축물을 단지 재산 증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작품으로서 감상하고 즐기는 문화가 있구나. 이러한 취향을 함께 나누는 재미와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거다.


내가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던 건축물에는 별다른 간판 없이 숫자 ‘2226’만 적혀 있다. 정갈한 세로창이 열 맞추어 배치된 옅은 노란색의 건물은 두 개 층마다 세로선의 각도가 어슷하게 비틀어져, 내가 보지 않는 사이 슥 움직였다가 멈춘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저것이 만약 사람이라면, 아마도 짐짓 정숙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도발적인 묘령의 여성이었을 것이다.


‘2226 빌딩’이라고 불리는 이 건축물은 바움슐라거 에벨레Baumschlager-Eberle의 작품이다. 건축가 카를로 바움슐라거Carlo Baumschlager와 디트마 에벨레Dietmar Eberle가 1984년에 함께 세운 건축회사라,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붙였다. 사실 이곳은 우연히 찾은 보석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산책을 나온 건축과 교수님이 여기를 발견하고 꼭 가서 보고 와야 한다고 추천했던 것. 덕분에 스치고 지나갈 뻔한 오스트리아의 루스테나우Lustenau라는 도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하고 싶은 마음의 방향이 취향’이라고 했던가. 건축에 대해 배우고 경험하고 느끼고 싶은 마음의 방향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다.  


   

생각의 공유가치의 건축

자잘한 흰 돌과 검은 돌이 깔린 마당 한가운데, 야트막한 물의 정원이 마치 거울처럼 2226 빌딩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거울 속 고운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니 내 키 두 배는 될 법한 나무문이 툭 열린다. 들어가니 하얗게 채워진 공간에 광선검 같이 쨍한 전등이 천정을 가로지르고 있다. 나무문만한 여러 개의 창이 액자가 되어 바깥 풍경을 끌어들인다.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으며 작품들은 존재감을 빛낸다. 돌이 주 소재로 쓰인 전시작은 저마다 위치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다른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가보니, 둘러앉는 소파와 테이블, 주홍빛 전등갓이 눈에 띄는 휴게 공간이다. 네댓 명이 탁자에 둘러서서 수다를 즐기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미소로 답해준다.

“여기를 돌아보고 싶어요? 내가 안내해줄게요. 2층부터 6층까지는 내가 일하는 건축사무소예요.”

반짝이는 두 눈이 예쁜 제이넵은 건축회사 바움슐라거 에벨레의 건축사였다. 내가 건축여행 중이라 하니 기꺼이 둘러보라며 고맙게도 안내를 자처해주었다. 그녀를 따라 나무 계단을 올랐다.


2층은 건축 업무를 위한 사무 공간이었다. 드넓은 공간에 작업대가 무리 지어 놓여 있고, 책장에는 서류철과 도서, 자료 등이 빽빽했다. 천고도 높고 채광이 좋은 데다 공간에 여유가 있어 이곳에서 일할 맛이 날 것 같았다. 직원들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슥 보고 다시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눈인사를 건네며 그들의 업무에 방해가 될까봐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공간에는 그들이 건축 설계와 시공을 위해 애쓰는 시간과 노력이 배어 있었다. 색펜으로 커다랗게 X표가 쳐진 설계도면이 벽에 한가득 붙여져 있는 걸 보니 왠지 서럽기도 하고 찡하기도 했다. 각종 타일과 천 조각을 붙인 샘플 판넬 등도 곳곳에 펼쳐져 있거나 세워져 있었다. 건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작게 잘라 놓은 얇은 스티로폼이 책상에서 굴러다녔다. 한 조각씩 핀셋으로 집어 조심스럽게 붙였을 그들의 시간이 그려졌다.


한쪽에는 건축회사 바움슐라거 에벨레가 작업한 각종 건축 모형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모형만으로도 대형 프로젝트를 얼마나 많이 해왔고 또 얼마나 고생했을지 느껴졌다. 그중 지금 내가 서 있는 2226 빌딩의 모형도 있다. 그래, 이렇게 시작되지. 상상이 스케치로 그려지고 모형으로 보여지고 비로소 건축물로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건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엄청난 작업이고,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과정이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왜 이 빌딩을 2226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우리는 에너지 효율을 통한 지속 가능한 건축에 대해 늘 연구해요. 대부분의 건축물이 유지관리를 위한 에너지를 엄청 소비하는데, 환경에 악영향을 끼쳐요. 이 건물은 냉난방시스템이 없어요. 그럼에도 섭씨 22에서 26도 사이 쾌적한 온도로 유지돼요. 센서로 제어하거든요. 또한 창을 깊게 만들어서 직사광선이 들지 않으면서 채광은 좋아요. 이로써 열에너지도 생기고요. 거기에 공기의 질을 측정한 센서가 통풍구를 열어줘서 자동 환기가 돼요. 2226라는 숫자는, 지구 환경을 위한 이러한 건축물을 2226개 짓는 프로젝트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 건축에 대한 선언문이기도 하죠.”


미래를 향한 선언문과 같은 숫자라…. 깊이 있는 고민을 거쳐 건축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건축 그 너머에 이들이 지향하는 내일의 건축이 있다.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나니, 2226 빌딩이라는 건축물이 지닌 가치가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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