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運命]의 목표
그러니까 나는, 분명하게도 죽음에 대한 뚜렷한 비전(vision)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죽음에 관한 확신과 통찰은 단순히 염세적이거나 우울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20대의 끝자락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끈질긴 방황 끝에,
죽음이야말로 삶의 목적 그 자체라고, 죽음이 곧 삶이며, 인생의 클라이막스에 달하는 순간이라 믿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이상, 그토록 숭고한 일생일대의 사건을 만반을 다해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여생에 거의 확정적으로 예고된 유일한 세리모니(ceremony)인 장례식을,
그야말로 기막히게 준비하고야 말 터였다.
그도 그럴것이, 요즘 같은 시대에 결혼식을 기정사실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더불어, 대단한 결심으로 학업에 다시 도전하지 않는 이상, 졸업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음을 기리는 장례식은 거의 필연적으로 예정된 사건이다.
이렇게 확실한 미래가 주어진 것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의 장례식은 철저한 계획 끝에 이루어져야 할거야.'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인생의 목표였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교회일까? 아니면 집? 차라리 갤러리를 빌리는 건 어떨까?'
'부고장은 어떤 디자인으로 제작할까? 문구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방문객들이 마지막으로 나를 직접 보고 인사할 수 있는게 좋을까?'
'마지막 날에 갈아입을 수의는 어떤 디자인으로 할까? 구성품은?'
삶의 종착점을 위한 준비는 역설적으로 몹시 창조적인 과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일생일대의 의식을 준비하며 들떠 있었다.
그 '멋진 구상'들은 내게 늘 당연했던 오늘을 지나 내일로, 또 모레로, 다음 달, 그리고 내년으로 미뤄져만 갔다. 모든 것이 나의 계획 대로 완벽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리고 지난 8월, 삶은, 아니 죽음은, 계획은커녕 예상조차 하지 못한 순간에 불쑥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