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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 Feb 04. 2024

단편 1. 인샬라 블루

소설



인샬라 블루



사내는 호텔 옆 해변에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 불어오는 바람에 흰 머리 섞인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부드러운 모레가 지친 양손바닥에 느껴졌다. 정오의 해는 눈부셨다. 모로코의 봄, 파란 탕헤르 2월, 13년만이었다.


동양인 사내는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 옛날 이제 막 서른이 되었던 그녀와 마주앉아 피자를 먹었던 레스토랑 자리엔 하얀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사내는 그 하얀 호텔 609호에 묶고 있었다.


사내는 광장 같은 넓은 거리를 걸었다. 한적했고 차 몇 대가 오가고 있었다. 저 멀리 지중해 너머 스페인이 보일 것만 같았다. 사내는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모하메드와 오스만제국의 눈부신 도시 이스탄불 그리고 그만큼 오래된 예루살렘 전쟁,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의 함대로부터 터져나오는 포성소리, 무슬림 형제들과 검은 피부를 지닌 형제들이 흘린 피, 북아프리카를 가로지른 거대한 아틀라스 산맥과 그 아래 광활히 펼쳐진 사하라 사막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파란 하늘과 바다 너머 광대한 것들을 바라보며 걷던 사내는 순간 어떤 작은 생명이 자신의 다리를 안는 것을 느꼈다.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6살 남짓한 모로코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폭 안겨 있었다. 안긴 아이 뒤로 장미꽃 세 송이를 든 고만한 다른 여자아이도 보였다.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사내를 꼭 안고 있었다. 동양인인 사내에게 작은 도움을 청하는 작은 몸짓이었다. 그녀의 어린시절을 닮은 아이의 몸짓이었다. 6.25 전쟁 후 사내의 고국 동쪽 변방 작은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추었을 몸짓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모로코 여자아이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주섬주섬 헐렁한 하얀 바지 뒷주머니에서 파란 200디르함을 꺼냈다. 아이의 눈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도 보는 듯 번쩍 뜨였다. 사내는 뒤에 있는 아이도 불렀다. 그리고 모로코 아이들의 언어로 말했다.


“거리를 건널 땐 좌우를 살펴보고 천천히 건너야 해. 알았지?”


두 아이는 동양인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그들의 언어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입이 벌어진 채 동양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꼭 그렇게 할거지?”


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란 종이를 한 장씩 손에 든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웅크려 앉은 사내를 꼭 안아주었다. 사내는 저 멀리 사라지는 하얀 웃음들과 몇 번씩 흔들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을 장구히 흐르는 역사와 장엄한 자연을 바라보듯 멍하니 보았다. 그의 손엔 파란 종이 두 장으로 얻은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사내는 손에 들린 붉은 장미를 바라보며, 지중해의 강한 바람이 불 때면 예민한 큼직한 눈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바람에 검은 히잡이 뒤집어져 그녀의 얼굴을 형편없이 덮을 때면 포기한 듯 잠시 서 있던 그녀, 낙타처럼 긴 속눈썹이 신기해 바라보면 속눈썹이 길면 눈 건강에 좋지 않다고 불평하던 그녀, 그 조그마한 손으로 세상을 어찌 살아갈지 염려가 되던 그녀를, 사내는 떠올렸다.


사내는 회색 빛 시멘트 보도에서 내려와 붉은 장미를 흔들며 하얀 해변을 또 다시 걸었다. 그는 바람에 날리는 하얀 모래의 표면을 하얀 케익처럼 부드럽게 밟으며 나아가다 그만 부드러운 그 위로 조용히 주저앉아 드러누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그의 영혼 전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한 파란 탕헤르 2월이었다. 눈 감아도 보이는 파란 탕헤르 바다와 하늘은 윤동주 손에 묻어난 파란 물감처럼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진하게 물들었다. 그의 낡은 얼굴, 마음의 지친 창엔 미소가 부드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렇게 얼마간 그는 파란 모로코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환상에 젖은 사내의 얼굴 위로 아라비안 향을 머금은 시원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향이 나타나면 언제나 뒤이어 들려오는 이상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바랐던 진달래처럼 곱고 부드러운 가녀린 아기염소들이 아닌, 제어 불가능한 사나운 원숭이 세 마리의 목소리들이 혼돈 속에 공명하며 만들어낸 소음에 가까운 음악 소리였다.


사내는 자신을 부르는 꿈결처럼 가녀리진 않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잠든 척 눈을 질끈 감은 사내는 자신의 볼을 매만지는 여전히 조그맣고 차갑지만 약간 통통해진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볼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사내는 웃음을 참으며 죽은 듯 있었다. 6살짜리 막내 아들이 달려와 그의 얼굴에 모레 바람을 끼얹기 전까지는.


사내는 깨달았다. 13번 째 파란 탕헤르 2월을, 13년 만의 파란 탕헤르 2월로 느껴보려 했던 ‘소설가의 낯설게 바라보기’가 일단 여행 첫 날에는 물 건너 갔다는 것을…


사내는 약간 통통해진 그녀 곁에 서서 저 멀리 달려가는 큰 원숭이, 중간 원숭이, 작은 원숭이를 보았다. 그는 조그맣고 차가운 손을 부드럽게 잡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부드럽고 고요하고 가녀린 귀여운 작은 염소가 또 하나 태어나는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사랑스러운 손은 사내의 손을 야멸차게 뿌리쳤다. 낙타처럼 긴 속눈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깜박거렸다. 사내는 자신을 노려보는 얍실해진 회색 빛 눈을 황홀히 감상했다.


그리고 가녀린 목소리가 말했다.


“인샬라”


2024. 02. 0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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