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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하 May 05. 2024

기억 중독

짧은 소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마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게 필요했다. 과거도 머릿속도 아닌 햇빛이 선명한 현실에 나를 쑤셔 넣어 줄 무언가가 있으면 싶었다. 계절은 흰 벚꽃이 지고 난 다음이었다. 밝은 야외 운동장을 보고 서서 잠깐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지만 눈물이 나진 않았다. 어젯밤에 남겨서 선반에 올려둔 블랙이 생각났다. 어제는 괜한 짓을 했다. 다시 무거운 식탁 의자를 질질 끌어와서 조심스럽게 등받이를 잡고 올라섰다. 쓸데없이 두꺼운 덮개를 열어젖히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술병을 꺼냈다. 아래에 있는 테이블까지 내리는 동안 몸이 한번 휘청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하나 깨트리거나 헛디디지 않았다. 

  천지에 꽃이 피었다고 해서 광대에 연분홍을 펴 바르는 생각은 지나치게 개방적이었다. 대신 흰 파우더를 미간에서부터 코끝까지 길게 흩뿌렸다. 무엇이든 생과 연관된 것이 피어날 터였다. 문득 둥그런 눈동자가 그저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브라운 색 마스카라 스틱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거울 앞에 세워둔 휴대폰 영상에 잠깐 눈길이 머물렀다. 잉크가 두껍게 묻은 솔로 속눈썹을 빼 올리는 동안 눈알이 계속해서 쇼츠 영상으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머릿속은 또다시 그 지점에 가 있었다. 영상의 내용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탁탁, 뚜껑을 덮고 일어났다. 풍성하게 마른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 두 손 가득 쥐어서 스프링을 튀기듯 한번 치켜들었다가 늘어트렸다. 플로럴 말고 버터밤 향이 계절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감각으로 변했다. 늦지 않게 집을 나서야 했다.

  두툼한 남자의 손이 내 손을 몰아 쥐는 바람에 나는 거의 남자에게 매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나누었고 다들 그렇게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국제회의 참석자라도 된 것처럼 유난스럽게 악수까지 청했다. 그가 내 손을 끌어가다시피 당겨서 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앞으로 풀썩 엎어질 뻔하였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벽에 걸린 LED 시계를 봤다. 11:05 AM. AM이 PM으로 변했으면 싶었다. 그건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시간이 훌쩍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는 건 쉬운 일이어야 했다. 실내는 그늘지고 건조했다. 그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흰 표정으로 서로에게 다정했다. 그들이 나눈 대화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지 입에서 욕설이 헛나온 것처럼 과장되게 하던 누군가의 몸짓이 잊히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훌쩍 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고 내 앞에 메뉴판이 놓였다. 나는 스카치를 주문하기 전에 우선 에일을 골라야 하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목구멍을 긁는 갈증 때문에 온종일 따라다니던 맥 빠진 고단함이 누그러진 기분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누군가 이쪽을 힐끔거리다가 내 시선과 얽혔다. 그가 턱을 치켜들며 되돌아가 옆의 귓가에 대고 소곤댔다. 그의 입술이 들썩일 때마다 비틀린 것처럼 보였다. 어떤 미련이 그에게 남았는지 슬그머니 돌아와 내 주위 어딘가를 훑어내렸다. 그의 눈 안에 작은 조명이 비쳐 들어가 쨍한 빛이 쏟아져 보였다. 빛은 그 지점까지 뻗어가 나는 다시 거기에, 그 진공의 빛 속에 있었다.

  우리는 차 안에 있었다.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실려 가고 있었다. 어차피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누군가 멋진 시간을 지나왔다고 했다. 그의 모든 시간이, 그러니까 그날 그 시간도 그에겐 전리품인지 나는 그게 알고 싶었다. 나는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실은 그곳에 있었다. 한순간 격한 부정의 소리가 나를 제자리로 밀었다. “안돼.” 우리는 차 안에 있었다. 나는 공중에 뜬 채로 앞에 두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앞면 유리창으로 가서 부딪히는 걸 지켜봤다. 어느샌가 나는 차 밖에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건너편 차 안에 있는 남자의 양 어깨가 핸들 위로 넘어와 있었다. 그의 목이 불가해한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나는 그가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피투성이의 여자가 얼굴을 내게 돌려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수로 그걸 묻는지가 의아했다. 그녀가 목이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증상이 곧 내게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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