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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27. 2022

군입대 대장정

 목련꽃 봉오리가 슬쩍 얼굴을 내밀던 어느 봄날, 아들에게 입영 통지가 왔다. 이메일로 전달된 입영 통지서. 출력하고 보니 달랑 종이 한 장인 통지서가 내심 서운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는 젊은이의 충정은 차치하고라도 그간 군 입대를 위해 쏟은 시간과 마음고생을 위로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들이 군 입대를 위한 대장정에 돌입한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신체검사를 받고 온 아들은 1등급 확인서를 들고 와서 내게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국가의 부름에 언제든 달려가겠다는 의지로 호기롭게 다음 학기 휴학계를 학교에 제출했다. 조만간 입대할 아들이 어디 상하지는 않을까 나도 마음이 쓰였다. 부디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내가 그런 기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들이 처음으로 지원한 군악병 면접에서 ‘한동안 보컬병을 뽑을 계획이 없다’는 말을 듣고 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군악대가 안 되면 다른 부대에 지원하면 되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왕 가는 거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싶다던 아들은 곧바로 해병대에 지원했다. 한 달에 한 번 지원 가능한 해병대에 두 번 지원해서 두 번의 고배를 마신 후에야 아들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길고 시린 겨울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해가 밝아도 국가는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연초인데 육군 지원병마저 늦가을까지 다 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나라의 부름을 기다리는 데 긴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팬데믹으로 시절이 하 수상하니 젊은이들이 군으로 몰리고 있었다. 나라 지키러 간다는 데 어서 오라고 반길 줄만 알았지 ‘줄을 서시오!’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우리는 몹시 난감했다.  

 

 병무청에 문의해 보았다. 매주마다 지원병 보충인원을 뽑으니 거기에 신청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자원했다가 취소한 병력을 보충하는 것이기에 많아야 십여 명 혹은 이십여 명 뽑는 것이었다. 첫 주 신청 사이트에 접속을 해 본 아들은 할 짓이 못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열다섯 명 뽑는데 동시접속이 칠백 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선착순에서 미끄러진 아들은 도저히 집에 있는 컴퓨터로는 대결이 안 될 것 같다며 PC방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아들은 매주마다 PC방 컴퓨터를 무기 삼아 ‘군입대’라는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아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 가족의 대화도 자연스레 군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군대 얘기라면 아무래도 남자들의 전유물 같지만, 학창 시절 이 주 동안 공수부대에서 훈련받은 경험이 있는 나도 제법 대화에 낄 만한 일화를 몇 개 가지고 있다. 일명 ‘막타워’라고 불리는 모형탑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린 지상 공수교육이나 처음 도전해보는 사수로는 흔치 않은 사격 점수라며 칭찬받았던 일, 십분 안에 씻고 집합하라는 명령에 못다 말린 긴 머리를 풀고 나갔다가 기합 받은 일 등은 유쾌한 추억이다. 그 긴 머리가 화근이 되어 작지 않은 사고를 내기도 했다. 레펠 훈련을 받는 중에 헐겁게 묶은 긴 머리가 로프에 끼어 허공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나를 구하러 온 조교는 많이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으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당시에 나는 머리카락이 뽑힐 듯한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대롱대롱 매달린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까 싶어 창피한 마음만 가득했다. 그 사건 후에도 한동안 친구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수모를 겪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군생활의 즐거운 이야기였지만, 아들은 그런 군에 언제 갈지 기약이 없었다. 매주 아들의 패전 소식이 들려왔다. 점차 전장에 나가는 아들의 어깨가 처져가는 게 보였다. 겨룰 수 있는 무기가 ‘빠른 손가락 놀림과 운’뿐이라는 사실이 아들을 더욱 지치게 했다. 찬바람의 기세가 사그라들고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질 즈음 아들의 고민은 더 깊어지는 듯했다. 여차하면 군대 가기 전에 일 년을 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들은 차라리 입대를 가을로 미루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살고 싶은데 마냥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냥 놀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주위의 말들은 아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군가 지원군이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남편이 아들과 함께 pc방에 가기로 했다. 물론 병무청 사이트에는 아들만 들어갈 수 있지만 응원하는 아빠가 옆에 있으면 힘이 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점심시간을 쪼개 남편이 아들을 응원하러 간 지 몇 주가 지났다. 남편은 도대체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알아보자며 아들이 지원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오겠다고 했다. 


 단 몇 초간의 긴박한 싸움. 싸움이 시작되는 그 순간 내 마음도 그 전쟁터에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일, 이 분이나 지났을까. 카톡이 울렸다.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영상 속에 ‘새로고침’을 연거푸 누르는 아들의 손이 보였다. 십여 차례 다시 누르기를 계속하더니 갑자기 아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선착순 모집에 들어간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남편은 아들이 ‘군입대’라는 전쟁터에서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을 영상에 담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아들은 드디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됐다.      


 육군 신병교육대. 같은 사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남편은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았다. 상병 시절, 철책선 보초를 서다가 같은 조원인 이등병에게 임무를 맡기고 철 모를 깔고 앉아 잠깐 잠이 들었는데, 시찰 나온 중대장을 보고도 철모에 낀 엉덩이가 저려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말에 한참을 웃었다. 그 일로 삼일 동안 완전군장을 하고 타이어를 끌며 연병장을 돌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색해진 짧은 머리에 자꾸 손이 가는 아들과 긴 포옹을 했다. 요즘은 통화도 자주 할 수 있고 부대 내에서의 생활을 매일 사진으로 올려줘서 오히려 같이 살 때보다 더 자주 본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도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부디…. 


 주책맞아 보일까 봐 아들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초록이 산을 덮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다. 아직은 나뭇가지가 앙상하네.”

 “잘하고 올게요, 엄마.”

 내 맘을 읽은 듯 환하게 웃어주는 아들. 신병교육대로 향하는 아들의 발걸음이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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