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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11. 2022

B형 남자의 우산

 드디어 기다리던 비가 왔다. 봄철 건조한 날씨에 산불 조심하라는 경보를 여러 번 듣던 차라 반가운 봄비였다. 혼자 쓰기에 적당한 접이식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통통. 우산을 튕기는 봄비의 경쾌한 소리가 비 오는 날 산책을 더욱 부추겼다.


 우산을 쓰고 걸으니 내 시야가 우산 속에 갇혔다. 주위에 산만해지지 않고 내 발걸음에 충실해졌다. 나를 지나쳐 앞서가는 사람의 큰 보폭에서 그 사람의 바쁜 마음이 읽혔다. 느긋하게 빗속을 걷고 있던 나는 바쁜 마음에게 길 한쪽을 내어주는 여유도 부려 보았다. 


 횡단보도 앞, 내 앞에 두 사람의 발이 가까이 붙어있었다. 우산을 슬쩍 젖히고 고개를 들었다. 한 우산에 다정히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남녀의 뒷모습에서 봄 향기가 퍼져 나왔다. 우연히 가는 길이 같았는지 아니면 내 맘이 그쪽으로 기울었는지 나는 한동안 그들 뒤를 따라갔다. 흐트러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보아 그들은 아직 풋풋한 연애의 시작점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마음의 거리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붙으면 비를 덜 맞을 텐데. 둘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 가고 있었다.


 B형 남자가 O형 여자를 만났던 그 해도 마른 봄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봄꽃이 시들도록 비 소식이 없어서 목마른 이들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날은 맑기만 한데 B형 남자는 둘이 쓰고도 남을 커다란 우산을 매일 갖고 다녔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냐는 O형 여자의 농담에도 씩 웃기만 할 뿐 달리 답이 없었다. 지팡이처럼 짚고 다닐 때마다 탁탁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익숙하다 못해 인식조차 되지 않을 즈음에서야 비가 내렸다. B형 남자는 큰 우산을 활짝 펴고 O형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의 어깨를 우산 속으로 끌어당기는 남자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우산 위로 비 맞은 봄꽃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앞서 걷는 남자는 아직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다소 얇은 옷을 걸친 여자를 위해 입고 있는 트렌치 코트라도 벗어주면 좋으련만 남자는 그것조차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열 번도 더 코트를 벗었는지도 모른다. 섣부른 호감의 표시가 오히려 여자의 마음을 달아나게 할까 봐, 남자는 홀로 애태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산을 튕기는 빗방울 소리가 잦아들었다. 내 앞의 두 사람은 비가 그친 후에도 우산을 접지 않았다. 우산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았다. 둘만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B형 남자는 오랫동안 큰 우산을 갖고 다녔다. 햇살이 뜨거우면 양산으로 바람이 세게 불면 바람막이로 변하는 그 우산은 언제나 남자의 손에 들려있었다. 큰 우산이 든든한 방패 같아서 O형 여자는 자꾸 B형 남자의 우산 속으로 숨었다. 우산 밖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우산 속에 있었다. 그 안에서 둘은 발을 맞추고 눈을 맞추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좁은 골목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앞서 걷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엉겁결에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예기치 않은 사고는 막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작은 도화선이 되곤 한다. 다시 걷는 두 사람의 거리가 확실히 좁혀져 있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우산이 한 뼘은 더 넓어진 것 같았다.


 B형 남자의 우산은 언제부터인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우산이 작아지면서 O형 여자가 우산 속으로 숨는 일도 줄어들었다. 남자는 더 이상 큰 우산을 들고 다닐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여자도 점점 우산 속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둘은 각자 우산을 쓰고 걸었다. 서로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눈을 맞추지 못했다. 우산 밖 세상에서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고 고스란히 흉터로 남았다.


 O형 여자는 사라진 방패가 그리웠다. 그 방패를 든 B형 남자도 몹시 그리웠다. 남자는 왜 큰 우산을 들 힘이 없어졌을까. O형 여자는 그 큰 우산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산은 항상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자는 우산 속에 숨기 바빠서, 남자도 숨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우산 밖은 남자에게도 위험하다는 것을…. 남자에게 미안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앞서 걷던 두 사람을 놓쳐버렸다. 마치 같이 걷던 이들을 놓친 양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 한 우산을 쓰고 걸어갔을까. 예전에 B형 남자와 O형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오고 갔을까. 


 고작 뒷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지만, 어깨가 젖지 않게 그들이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나는 발길을 돌렸다. 혼자 돌아갈 길이 멀었지만 가는 길에 둘이 써도 넉넉한 큰 우산을 사갈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다음 비 오는 날에는 B형 남자의 우산이 되어주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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