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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16. 2022

설탕 한 스푼

  초록이 점점 짙어가는 어느 날,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섰다. 농부의 잰걸음이 논밭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물꼬 터 줄 주인을 기다리는 잘바닥한 논바닥에 햇살이 안겨있었다.

 

 저기쯤이었을까. 차창 밖으로 논배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랑논 중간 언저리에 있는 작은 땅, 주인을 닮은 것인지 논두렁에 난 잡초들마저 말끔히 이발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저 논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이 남은 식솔들을 위해 유일하게 남기고 간 한 뙈기의 땅이었다. 여인은 그곳을 바지런히 드나들며 살피고 가꿨다. 모내기를 하루 앞둔 그날, 여인은 ‘한 해 농사 잘 되게 해 주십사’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논 한 바퀴를 휘 돌아보고 있었다. 저 밑에서 누군가 휘우듬히 걸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낮술에 취한 동네 사람이려니 했으나, 가까워질수록 눈에 익은 모습에 여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들이었다. 취업 준비로 도시에 나가 있는 아들은 딸만 내리 낳다가 어렵게 얻은 여인의 자랑이었다. 아들은 시험 보러 간다며 아침에 전화를 했었다. 이제 겨우 해가 중천인데 이 시간에 아들이 비척비척 다랑이 논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들은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엄마, 저 공부 그만 둘랍니다.”

 “….”

 

 여인은 깊은 한숨을 천천히 끊어 쉬었다. 아들의 말이 진정이겠는가. 홀어머니 등골 빼는 자신이 미워서 하는 말임을 여인이 모를 리 없었다. 여인은 속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던 돈 봉투를 꺼내 아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잔말 말고 한 번만 더 해 봐라. 사내놈이 어깨 펴고.”

 등 떠밀어 아들을 보낸 후 여인은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다음날 모내기 일꾼에게 줄 품삯을 구해야 했다.

 

 여인은 훗날 며느리를 맞았다. 그렇잖아도 달달한 믹스커피에 설탕 한 스푼을 더 타서 마시며 여인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네 남편 공부할 적에 하도 답답해서 점 보러 안 갔냐. 근디 거기서 그러더라. 높은 대에 관복 입고 앉었는디 뭣이 걱정이냐고.”

 귀한 아들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일침인 것을 며느리도 알아들었다.

 

 잠시 차를 멈추고 여인이 살던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교회 종탑은 여전한데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답답한 일이 생기면 점집을 찾고 무시로 정화수 떠놓고 빌던 여인이 교회를 찾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아들이 군대 간 지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이 암에 걸리고 만 것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너그럽고 다정한 남편 덕분에 행복했던 여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마음먹은 여인은 갖은 방법을 다 써도 소용이 없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원에 들어갔다. 여인은 끝내 남편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이후에는 정화수 앞에서 비는 대신 교회에서 기도했다. 신에게 하소연을 하고도 못다 푼 응어리는 며느리에게 풀어놓았다.  

 

 “남은 자식들 건사할 일이 꿈만 같고, 내 속이 어쩠겄냐. 군에 있는 아들이라도 봐야 살 거 같아서 그 먼 강원도를 몇 번이나 쫓아갔는지 몰라야.” 

  차편도 여의치 않았던 시절, 전라도에서 강원도를 오가는 일이 어찌 만만한 일이었겠는가. 여인은 커피에 설탕 한 스푼을 더했다. 여인의 애달픈 마음이 설탕에 녹아드는 것을 며느리는 여러 번 보았다.

 

 서서히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며 마을을 나섰다. 여인을 보고 싶었다. 거동이 불편해진 여인이 몇 해 전부터 머무는 요양병원 앞에 차를 댔다. 병원 앞이 한산했다. 비대면 면회만 허락되니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뿐, 손잡아 줄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안타까운 눈빛만 나누는데 갑자기 여인이 아기처럼 울었다.

 “왜 안 들어오고 밖에서 그려.”

 

 전염병이니 팬데믹이니 하는 말들이 여인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장부로 가족을 이끌던 당당한 모습은 간 데 없고 부모 잃은 아이같이 슬픈 눈만 끔벅거렸다. 매주마다 여인을 울릴 수밖에 없는 며느리는 여인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는 간병인에게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간병사님, 수고스럽겠지만 어머님 커피에 설탕 한 스푼만 넣어주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에 어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깊은 한숨을 끊어 쉬었다. 서쪽으로 완전히 기운 해는 유난히도 붉은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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