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정희 Sep 03. 2022

그날 우리는 배가 고팠다

 햇살 좋은 오후 통유리 너머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서 K와 마주 앉았다. 저 멀리 윤슬이 은빛 지느러미를 파닥이는 물고기 떼 같았다. 벚꽃마저 흐드러져 더없이 화사한 봄날이었다.   


  K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며칠 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소식에 종일토록 심장이 빨리 뛰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냥 전화기를 들었다. 응답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입에 침이 말랐다.

 

 “여보세요.”

 

 긴 기다림 끝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K의 목소리가 밝았다. 밝은 목소리 뒤에 감춰진 그녀의 어두운 마음이 보였지만 나는 짐짓 들뜬 기분인 양 말했다.

 

 “봄꽃이 한창이네.”

 

 내가 꽃타령할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도 K는 꽃 보러 가자는 내 말에 응해 주었다.

 

 K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다디단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었다. 세상 재미나 죽겠다는 듯 웃음을 허공에 뿌리며 K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나도 박장대소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기쁨과 슬픔은 한 가지에서 나왔다고 했던가. 슬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고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작위적인 웃음은 우리에게 허탈감을 몰고 왔다. 잠시 쓸쓸함이 K의 얼굴을 스쳐갔다. 곁에 있어도 그녀의 아픔에 닿을 수가 없었다. 무력해진 나는 카페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걸을까?”

 

 호수 둘레길에 나섰다. K의 얇은 원피스 자락이 사락거렸다. 하늘하늘 내려온 연분홍빛 꽃잎이 그녀의 치마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메멘토 모리!”

 

 느닷없는 K의 말에 순간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코너를 돌아 달려오는 자전거의 경적이 멍한 나를 깨웠다. K는 지금 죽고 싶다는 말인가 아니면 살고 싶다는 말인가. 

 

 언젠가 K와 함께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메멘토 모리.’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가 주제였다. 아직은 죽음이 멀게 느껴질 나이였지만 우리는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남긴 유산이 거짓이나 허영이면 안 된다고 호기롭게 술잔을 부딪쳤다. 

 

 K는 그날 우리의 대화 중 어느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일까.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누구나 그렇듯 자신도 죽는다는 말일까. K의 머릿속이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잘 살아야겠지.”

 

 나는 삶 쪽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K의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멈췄다. 연분홍 꽃잎이 자꾸만 땅에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꽃잎도 K의 얼굴도 볼 자신이 없어서 멀리 시선을 돌렸다.

 

 “꽃은 피면 지는 거야.”

 

 K는 떨어진 꽃잎을 밟았다. 그녀가 나와는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메멘토 모리.’ 우리가 그날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결코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삶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죽음을 경외하고자 했다. 이렇게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자는 말은 우리 대화에 없었다.

 

 “꽃이 다 같은 시기에 지는 건 아니야.”

 

 다급한 마음에 뱉은 말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K가 웃기 시작했다. 다디단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은 것을 잊은 듯 배가 고프다고 했다. 몸속 세포들이 병과 싸우려니 에너지도 많이 필요하겠지. 근처 맛집을 검색하는데 K가 말했다.

 

 “염려 마. 난 봄꽃은 아니니까.”

 

 갑자기 나도 배가 고팠다.


이전 08화 천 원의 의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