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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10. 2022

광야와 신작로

 우연히 반가운 이를 만났다. 앳된 소녀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있던 그녀가 어느새 훌쩍 성인이 되어 먼저 알은체를 했다. 수줍은 듯 어색하게 웃는 그녀에게서 어두운 그늘이 보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밥 한 끼를 같이 하고 싶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전골냄비를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쥐어준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번 뜨는가 싶더니 이내 내려놓고는 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오래전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사방이 어둡고 곳곳에 걸림돌이 있는 길. 그 길 위에 자신이 서있는 것 같다고 했다. 도저히 그 길을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날마다 주저앉는다고 했다.


 힘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 속에서 오래전 내 모습을 보았다. 생각은 많았지만 몸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했던 그때, 내 마음은 허공에 떠서 마치 내 몸을 무중력 상태로 이끄는 것 같았다. 내 앞에 놓인 여러 갈래의 길. 어느 한 길로도 발을 내딛지 못하고 오늘은 이 길 끝을, 내일은 저 길 끝을 상상해 볼 뿐이었다.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누군가의 권유로 읽게 된 책 한 권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한 소설이었다. 


 드넓은 광야를 지나고 있는 개미 한 마리가 있었다. 눈을 들어보면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아 보일 뿐, 끝을 알 수 없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개미는 사방의 시야를 가리며 몸을 날려버릴 듯 밀려오는 흙먼지와 싸워야 했고, 앞길을 막고 서있는 바위를 피해 먼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이리저리 장애물을 피하다 보면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뒤인지 방향조차 알 수 없는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동물적 감각으로 방향을 찾을 때쯤이면 땅이 갈라질 듯한 진동이 온몸을 흔들었다. 아무리 고개를 젖혀 바라봐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엄청난 물체가 휙 지나갔다. 그 물체가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개미는 온몸으로 버텼다.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있는 소설의 한 장면이다. 개미가 왜 그 먼 곳으로 가려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설 속에서 나는 개미와 한 몸이 되어 그 광야를 지났다. 행여 지친 마음에 포기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개미인지 나인지 모를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게 간절한 응원을 보냈다.


 개미에게 완전히 감정이 이입된 나는 개미가 건너갔던 그 광야를 실제로 가보고 싶었다.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는 광야와 비슷한 곳을 찾아보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 두 대가 지나갈 만한 신작로가 있었다. 비포장인 도로는 내 걸음으로 일고여덟 보쯤 되는 너비였다. 개미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광야로 느껴졌을 법했다. 


 나는 개미가 되어 신작로의 한쪽 끝에 서 보았다. 개미의 눈높이로 길을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최대한 몸을 낮춰 그 길을 살펴보았다. 돌멩이 몇 개가 드문드문 놓여있고 두어 군데 움푹 파인 곳이 있는 이 좁은 신작로에 개미가 들어섰다. 개미는 얼마나 사투를 벌여야 저쪽 길 끝에 닿을 수 있을까.


 서너 명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퍼졌고 뒤따라 이는 먼지바람에 나는 잠시 숨을 참아야 했다. 개미 생각에 다시 몸을 낮췄다. 개미는 이 어마어마한  물체가 무엇인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실체는 알지 못한 채 그림자로나마 존재를 인식했을지 모른다. 어두운 그림자가 몰고 오는 후폭풍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잠시 길을 잃은 개미.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신작로를 가로질러 걸었다. 내 발길에 차인 돌멩이가 길 밖으로 튕겨나갔다. 개미가 피해 가야 할 바위 하나를 걷어내 준 셈이다. 나는 마치 개미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 길 위의 모든 돌멩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 길을 건너는 개미만큼은 좀 수월하길 바라며….


 수저를 든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자신의 길이 광야인지 신작로인지 가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뜻밖에 수호신을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광야에 있던 그 개미는 지쳤을 리가 없다. 매 순간 맞닥뜨린 장애물을 헤쳐 나가기도 바빴을 터. 광야를 건너 그 길 반대쪽에 닿은 개미는 아마도 광야를 건너기 전과는 사뭇 다른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밥공기를 다 비웠을 때 그녀와 나는 마주 보며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들었다고 느꼈다. 향 좋은 커피 한 잔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그땐 커피와 어울리는 대화를 나누자며 식당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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