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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20. 2022

그날의 동지

 견디기 힘든 열기가 캠퍼스를 감쌌다. 습한 기운마저 더해진 무더위에도 말끔한 슈트에 넥타이, 모자까지 갖춰 입은 아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여유를 보였다. 늘 그랬듯이 오디션 대기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니 코끝이 매웠다.

 

 아들이 나올 때까지 세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허기가 느껴졌다. 우선 차 안에서 요기를 하고 캠퍼스를 한번 둘러보자는 생각에 나무 그늘을 찾아 차를 세웠다. 평소에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것을 몹시도 어색해하는 나로서는 틴팅된 차 안이야말로 고마운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산 샌드위치와 커피로 나름 혼자만의 성찬을 즐기고 막 차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허름한 트레이닝복에 배낭을 멘 한 학생이 내 차 바로 앞에 서더니 “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 이이이이이….” 목을 풀기 시작했다. 그 더운 날씨에 마스크를 썼는데, 살짝 내려간 마스크 사이로 분장이 보였다. 얼마 전 재미있게 보았던 뮤지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어떤 노래를 준비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다음 조인데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연습을 하려는 것 같았다.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다가 내 차와 내 앞차 사이 좁은 공간에 둥지를 틀 모양이었다.  


 차 문을 열고 나가면 그 학생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잠시 기다려주기로 했다. “나나나나나. 노노노노노. 니니니니니….” 배낭 안에 갈아입을 의상을 넣어온 게 분명한데 옷이 다 구겨지면 어쩌나. 두 시간이나 일찍 와서 오디션 하기도 전에 지쳐버리면 어쩌나.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했다. 어차피 나는 학교를 둘러보러 나갈 참이니 내 차에 들어와서 좀 쉬고 옷도 갈아입으라고 할까. 그럼 에어컨을 켜주고 가야 하니까 차 키를 놓고 가야 하는데. 혹시 모르니 지갑도 갖고 나가야 하나. 이런, 내가 저 아이를 믿지도 못하면서  오지랖 넓은 짓을 하려고 했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냥 좀 더 기다려주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한참 후, 그 학생은 아예 털썩 주저앉아 연습을 했다. “바바바바바. 보보보보보. 비비비비비….” 차 안은 이미 열기로 가득 차 인중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데 그 학생은 아마도 ‘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까지 다 부를 기세였다. 차 창문이라도 조금 열면 좋으련만. 그러려면 시동을 걸어야 했다. 그 아이가 당황할 것을 생각하니 그조차 할 수 없어서 에어컨 있는 차 안에서 부채질을 하며 버텼다.


 내 신경은 온통 그 학생이 언제 ‘하’로 넘어가느냐에 쏠렸다. 거기까지만 기다려주자 거기까지만. 머리가 축축해지고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배려이니 그만큼은 참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최대한 열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평온을 찾으려 해도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몽롱해지는가 싶었는데 그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좀 전에 했던 “카카카카카. 코코코코코. 키키키키키….”를 다시 하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서 기다려주고 있는데 이미 한 것을 또 한단 말인가. 갑자기 열에너지가 뿜어져 나와서인지 숨쉬기도 힘든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내가 119 구급차를 부르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내 오른발은 저절로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버튼만 누르면 시동을 켜고 에어컨을 틀 수 있다. 

 

 갑자기, 그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차를 바라봤다. 내 숨소리가 들렸을까. 내 마음의 요동 소리가 들렸을까. 잠시 나를 노려보는 것 같던 아이가 내 차 쪽으로 걸음을 뗐다. 차 문을 두드리면 어쩌지. 어른이 쩨쩨하게 그걸 못 참고 그리 소란을 피우냐고 따져 물으면 어쩌지. 바짝 긴장해서 숨죽이고 있는데 내 차 뒤에서 서너 명의 아이들이 그 학생을 불렀다. 다행히도 내가 들킨 것은 아니었다. 그 학생이 건물을 돌아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룸미러에 비친 땀에 젖은 내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마음 편히 차 문을 열 수 있다. 막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내 앞차의 브레이크 등에 불이 들어왔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거친 시동 소리가 들렸다. 

 

 그날, 그곳에서 배려는 나만 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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