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랑 Oct 20. 2024

구의 증명 - 최진영

너무 진한 하얀색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정말 먹을까 싶은데, 정말 먹는다. 심지어 뜯어 먹는다. 그런데 이 소설엔 엽기도 사이코패스도 광기도 범죄도 없다. 그냥 아름답고도 슬픈 연애 소설이다. 


 남자 주인공인 구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지만, 구와 담의 사랑이 궁금했고, 또 염려스러웠다. 이 비도덕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고, 과연 그게 가능할지 싶어 염려스러웠다. 적어도 아름답다는 말과 뜯어 먹는다는 말은 절대로 어울릴 수 없다. 그러나 담이 구를 증명하기 위해선 가장 필요했던 표현이다.       


 죽음으로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은 생생한 묘사나 대사도 없이 대부분 구와 담이 서로에게 전하는 독백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내는 변명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에 비해, 그들도 모르게 사랑을 키워가는 어린 시절은 다채롭고도 풍성하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풋풋하며 귀여워 동화 같으면서도 드라마 같다. 


 그런 사랑과 함께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이었을까. 구와 담은 이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착했고, 조금 더 서로를 위할 줄 알았으며 그래서 사랑에 있어 더 많이 순수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에 비해 세상은 가혹했고, 결정적으로 그들에겐 돈이 없었다. 만약 그들 앞에 아름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난한 세상이 있었다면, 그들만의 성숙한 사랑을 보여주었을 텐데...... 


 어쩌면 이 사회에서 꽃피우지 못했기에, 사랑에 있어 누구보다 절박하고도 간절한 증명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충격으로 다가온 전개에 비해 그들의 사랑은 소소하고도 밋밋했으며, 또한 나약했고, 무엇보다 너무나 새하얗다.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자신을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읽는 이에 따라 담이의 행동을 식인으로 보지 않고, 단지 구를 온몸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담이의 바락과 같은 생각 혹은 시늉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극단적으로 그들의 사랑과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메시지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문장 그대로,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도 본다.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그 사랑은 그들이 소설 속에 있을 때 아름다울 뿐이다. 대개, 연애 소설은 영상으로 만드는 순간 더 아름다워지나, 이 소설만큼은 예외일 것이다. 구와 담과 같은 사랑을 꿈꾸지 않으며 이 현실에선 어떤 형태로든 마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렇기에 또 자꾸 곱씹어 보게 한다.


  이 현실 어딘가에 구와 담과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 비참함 속에서 더 치열하게 사랑하고 있는 커플도 있을 것이다. 억울한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도 있을 것이며, 그 고통 속에 미쳐버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감히 짐작조차 안 되지만,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다.      

 담이를 떠날 수 없는 구와 구를 보낼 수 없는 담이가 서로에게 전하는 독백에는 똑같이 천 년의 시간이 등장한다. 담이를 기다리겠다는 구의 시간이며, 그 시간이 걸려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겠다는 담이의 시간이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담아낼 만큼 그들의 사랑이 뜨겁거나 강렬하진 않았다. 


 이 소설은, 그들의 사랑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며, 더불어 세상의 수많은 사랑 중 하나 혹은 그 사랑의 변화를 보여주고 자 함도 아닌 거 같다. 그렇다고 구와 담의 삶에 빗대어 우리의 평범함에 안도하고자 함도 아닌 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읽는 이들에게 단지 강렬함을 주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이렇게라도 이 세상의 치열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쓰다보니 구와 담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마 그 무엇도 아니었을 거 같지만, 일단 소설이 독자에게 온 이상 다양한 추측과 추정으로 소설은 더 완성될 수 있음이다. 그렇기에 소설적 세계관에서 창조해낸 그들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엿보았고, 읽는 맛으로 충분히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렴풋한 무언가도 떠올려 보았다.


 흔히들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을 완전한 사랑, 더 나아가 완벽한 사랑으로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과 완벽한 사랑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구와 담의 진실하고도 순수한 사랑은 좋았지만, 그렇다고해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완벽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담이 구를 먹었다면 어설프다. 죽음으로만 증명되는 것을 현실에서는 볼 수 없으니, 소설에서 보여주었다는 말도 진부하다.


 ‘담이 잘 자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역시 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알 수 없었다. 담이라면 말해 줄 텐데, 자기 마음을 얘기하는 방법으로 내 마음을 말해 줄 텐데’     

 얼핏 보면 사랑에 관한 명문장이며 감동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글로 전해질 때 멋진 문장이며, 글로만 남을 때 더 강한 울림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든 저 독백은 죽은 구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 그 생각을 근거로 담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꿈꿨을 불완전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의 완전함을 느껴 보았다.   


 구와 담의 사랑을 파고들어가다 보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구가 너무나 안타깝지만 더불어 이 현실의 수많은 구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떠난 이를 세상이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남겨진 이의 지극하고도 당연한 욕심이다. 


 구의 죽음으로 소설을 시작했고, 구가 살아있었음을 증명하며 이어진다. 구의 존재가 담이를 통해서만, 담이와의 사랑을 통해서만 증명되어야 할 건 아니지만, 담이를 통해서, 담이와의 사랑으로만 증명되는 게 이 시대의 진짜 현실일 것이다. 



 다시 한번 그들의 사랑은 핑크색이 아닌 하얀색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잘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다른 색깔로 바뀔 수 있기에 지키기 어려웠을 거다. 게다가 너무나 진한 하얀색의 그 찐함을 도대체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문체나 서술 방식이 한결같이 담담한 호흡으로 이어져 소설적 분위기에 보다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다소 이해 안 가는 흐름으로 비칠 수도 있으나, 소설의 내용과 주인공들의 목소리가 겉돌지 않았기에 읽는 내내 그들과 함께 있는 듯했다. 

 잠깐이지만, 구와 담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과 사랑을 느끼면서 그간 보지 못한 것들, 생각하지 못한 것들 그래서 놓친 것들을 조금은 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구를 증명하며 나도 들여다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숲과 별이 만날 때 - 글렌디 밴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