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벌써라고 했고 엄마는 세상에 라고 했다. 할머니의 첫 번 째 기일이다. 아빠에게 일 년이란 벌써 흐르는 것이고 엄마에게 일 년은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할머니의 일 년은 어떻게 흘렀을까. 산자의 기준에서 할머니의 시간은 멈췄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요한 새벽에 시간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인터스텔라였나. 시간의 경계 너머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였다. 책장 너머로 쏟아지는 분절된 빛의 경계 사이로 두 눈을 부릅뜨고 목청껏 외쳐댔지만 그는 책장 너머의 세계에 닿지 않았다. 할머니의 시간은 멈췄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세계는 여전히 건재할까. 그 세계가 과학의 방식으로 존재하든 종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든 혹은 아예 존재하지 않든 간에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다. 같은 곳에서 동시대를 살아도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 너머의 일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겠나. 만약 어떤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건 그저 그 세계 나름의 독립적인 시간이었으면 한다. 영화에서처럼 이 세계를 바라보고 애태우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떠나고, 할머니의 유산이 나눠지기도 전에. 가장 먼저 타인에게 넘겨진 것은 바로 할머니의 전화번호다. 살아계시는 동안 가장 중요했던 바로 그 여덟 개의 번호는 일면식도 없는 어떤 이에게 의미 있는 숫자로 자리 잡았다. 정작 쓰고 있는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모르는 편이 낫겠지만,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도 그건 온전히 본인의 것만은 아닌 게 된다. 자본주의가 개인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당연히 추모가 아니라 양도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것, 의미 있는 것, 개인을 상징하는 소위 모든 개성이라는 것들조차 온전한 나의 선택은 아무것도 없다. 특별하다는 감각, 고유하다는 기분을 사고파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공공연한 영업비밀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여전히 그 번호는 나에게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할머니 번호의 새 주인은 카카오톡의 메인화면을 우주 사진으로 해두었다. 게다가 그 아래 상태 메시지에는 이런 문구를 적어두었다.
‘창백한 푸른 점 여기는 지구입니다.’
이럴진대, 내가 어떻게 그 번호를 지울 수 있단 말인가.
타인의 카톡 프로필을 훔쳐보는 것이 내 공공연한 취향이 아닐지라도, 아무 데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소름 끼치는 감상이 내 팔다리 털을 곤두세울지라도, 그 문구가 때론 할머니가 보내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전혀 다른 차원과 시간에서 나 여기 있다는 신호처럼 외롭고 담담하게 느껴진다.
남겨진 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 년을 보냈다. 망자는 잊히기 때문에 망자라고 , 그래서 죽음은 서글픈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우리의 일 년이 할머니에게 서글픈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잊힌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잊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하면서 남겨진 시간을 견디고 즐기고 살아낸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어떤 순간에 마법처럼 살아나 기억 속에 실존한다. 인간은 중요한 순간이 오면 아주 깊은 심연 속에서도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존재라서 그렇다.
우리는 일 년 만에 각자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할머니를 대면할 것이다. 모이든 말든 제사를 지내 든 추모식을 하든 밥을 먹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머니를 기릴 것이다. 그렇게 소환된 할머니의 모습은 결코 똑같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