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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Jul 06. 2023

살아남으면 장땡

생각지도 않고 있던 발령이 났다.

보통 3년에 한 번 순환보직을 하는데 2년 5개월이라 대상자가 아니라고 방심하고 있었다.  나름 대대적인 인사였는지 2년 5개월부터 모두 발령 대상이 되었다.   

뭐 발령철이니까 누구든 발령이 날 수 있는 거고, 인사는 인사권자 권한이니까 당사자들에게 일언반구 물어보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다.

다만 왜 항상 인사를 할 때, 문서를 그 발령 전날 오후 혹은 길어야 그 전전날 오후에 내는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실 조금 시간을 두고 발령을 내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1. 이왕이면 깔끔하게 밀린 일도 끝내놓고 서류철도 깔끔히 해서 후임자에게 죄책감 없이 일을 넘길 수 있다.  인수인계할 시간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일단 하던 걸 끝내만 놓을 수 있어도  후임자가 오자마자 개 빡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2.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사람은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분위기를 파악하고 맞춰가는 것부터, 그 안에 어떻게 섞일지 자신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일까지 보통 에너지 소모가 아니다.  미리 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어떤 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섞여 나갈지 사전조사를 좀 해 볼 수도 있다.  

3. 좋든 싫든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아쉬운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뭐 직장에서 만난 사무적인 관계끼리 뭘 이별을 하고 아쉽고 말고 하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서 만났건 인간과 인간이 함께 시간을 보낸 다는 것은 고도의 지적활동이다.  감정을 공유하고, 어떤 목적을 공유하고, 때론 공동의 적을 상대로 강한 동료애를 공유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함께 했던 시간을 갈무리하고 서로 아쉬움을 달랠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발령문서는 갑작스럽게 , 늘 발령 전일 아주 촉박하게 나는 걸까?

이토록 작은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토록 작은 권력이 왜 누군가에게는 우주적 충만함을 주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사를 결정하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소소한 권력을 만끽하는 그 시간이 개개인의 영혼에 행사하는 악영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수선한 소문들 속에서 자기들끼리 인사를 예측하며 초조함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최대한 촉박하게 , 당황스러운 나머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개개인의 불만을 피해보려는 비겁함.  나름대로의 친분과 평판과  본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다분히 개입시키면서 충족시킬  쩨쩨한 성취감과 비열한 자존감 같은 것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수군거림이 어디에서나 들리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감정들을 빈번하게 경험하게 되면서 변하게 된 내면의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참 근무를 하고 있는데 10시쯤 갑자기 발령장을 내밀며 발령 났으니 지금 짐 싸서 관내국으로 가라는 문서를 받아보고 나서는 하루 전에 알려주는 것도 조직의 가시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발령은 났다.  7월 1일부터 새로운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지난 4일간, 나를 부정하는 모습의 내가 나인 척 새 근무지를 오갔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일은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총괄에 있다가 관내로 오니 점심밥이 문제다.  밥은 해서 먹고 돈을 걷어서 반찬은 가까운  반찬가게에서 사다 먹는 시스템이었다.  나와 같은 타임에 소수의 인원이 앉아 밥을 먹는데 국장님을 포함한 세명의 여직원과 한 명의 남직원이다.  오늘 국장님이 남직원 빼고 셋이서 돌아가며 설거지를 하자고 말씀하셨다.

왜요? 저 사람은 설거지조차 못 맡길 만큼 미덥지 않은 사람인가요?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남자라서였다  

익숙한 공간에서 일하던 저번달의 나였다면

고추가 너무 무거워서 설거지를 하는 게 힘든가 보죠?라고 했겠지만, 발령 난 지 3 일 지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저,, 남자든 여자든 당연히 설거지를.... 아이에슨가..  정도로 조용히 넘겼을 뿐이다.  

검은 보자기를 하나 사야겠다.  아이에스가 원하는 여성상이든, 조선의 마지막 여인이든 눈깔도 안 보이게 얼굴을 칭칭 감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억눌렸던 내 자아가 폭발하듯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여하튼 잘 적응하고 있다는 얘기다.  

나 대신 출근하고 있는 이 몸뚱이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금의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버리면서 버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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