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자음과 모음을 배우나 싶더니 어느 날 주차장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ㅅ은 스스스스 'ㅗ'는 오오오오 스오스오 소!
ㅂ은 브브브 ㅏ는 바바바 이응은... 브아브아 바바바앙? 방?
ㅊ은 츠츠츠 ㅏ는 아아아 차! 소방차!"라고 소방차 전용에서 소방차를 읽어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간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세상에 글자가 이렇게나 많았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아이가 글자를 읽어내는 것을 보면,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 안도감과, 기특함이 뒤섞인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아이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 자라나는 하나의 세계를 지켜보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간판 앞에 멈춰 선 아이의 얼굴에 보이는 순수한 기쁨이 경이로울 때가 있다. 뭔가를 배우고 알게 되는 일이 인간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나에게 한글은 공포였다. 다섯 살 때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은 상을 앞에 두고 한글을 가르치던 엄마의 무서운 얼굴만은 기억이 난다. 어서 그 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 아무리 몸을 베베 꼬아도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글자들이 떠오른다. 겨우 그 시간에서 벗어나도, 세상 모든 곳엔 글자들이 있었다.
누군가 문 앞에 붙여놓고 간 전단지, 가게마다 붙어 있던 간판들, 티브이를 볼 때도 글자들은 불시에 나를 습격했다.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어디에나 글자가 있었다. '저거 뭐야? 한번 읽어봐'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 갑자기 긴장이 돼서 늘 버벅거렸다. 아무리 재미있는 곳을 가도, 집 밖은 언제나 위험했다. 글자는 늘 분위기를 망쳤고 나는 거기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가장 빨리 한글을 뗐고, 그 덕에 유치원 졸업식엔 대표로 뭔가를 읽었다. 그건 엄마의 자랑이고 기쁨이었지만, 나에겐 낙인이자 공포의 기억일 뿐, 잘못 끼워진 첫 단추였던 것 같다. 한글 이후로 숫자, 시계, 달력, 등 모든 것들,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나, 배워서 알게 되는 모든 것들, 모든 앎들이 나에겐 고문이었다. 알게 되는 것, 공부하는 것, 배우고 습득하는 것, 학습에서 단 한 번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곧잘 했던 것, 심지어 일정 기간까지는 뛰어나다고까지 했던 학습의 효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동력은 기쁨이기보다는 공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유효기간이 좀 짧은 것 같긴 하지만.
며칠 전에 아이가 신나게 글씨를 읽어내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가
"너도 다섯 살 때 글자를 읽었었는데"라고 하자 무심코"난 정말 싫었어 그래서 우리 애는 최대한 늦게 글자 배우게 하고 싶었는데.. 천천히 자연스럽게 일곱 살 때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거다.
"그땐, 내가 좀 잘못했던 것 같아."
너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아마도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고, 또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한 발 떨어져 보면서 엄마가 나를 키우던 그 시절을 좀 다른 시선으로 돌아보게 된 모양이다. 사실 예전의 부모님들은 우리와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가치관으로 우리를 키울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엄마는 반에서 일이 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여자를 왜 대학에 보내냐는 할아버지의 확고한 반대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한 터라 더욱 본인의 개인적인 미련이 교육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니 서른 살 이후로는 자기의 감정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감정적 기반을 마련해야 하고, 언제까지나 어린 시절 젊은 부모님의 약점을 원망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과 아닌 사과, 지나가는 듯한 인정을 듣자마자, 가슴속에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조금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나도, 배우는 일에 순수한 기쁨을 느낄만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공부를 진심으로 싫어했고, 언제부턴간 아예 앉아있는 일 자체가 고문이었지만, 성인이 돼서 스스로 이런저런 분야의 책을 찾아 읽고 읽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인정하긴 싫어도 배움은 기쁨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한글을 마주쳐도 알파벳을 마주쳐도, 보물을 찾은 것 마냥 그 자리에 서서 다 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 다 읽고 나면 기쁨과 뿌듯함으로 반짝이는 그 눈빛과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동그란 이마를 볼 때마다 어떤 막연한 의무감을 느낀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싶은 마음. 그저 저 기쁨이 삶에서 이루어 낼 모든 것의 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그럼에도 내가 저 기쁨에 반하는 다른 것들을 요구하게 될 것 같은 숙명 같은 불안감 앞에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초조하다. 다만 언젠가 내가 아이에게
그땐 내가 이건 좀 잘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왔을 때, 아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감정이 너무 깊은 서러움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늘 부족할 것이고, 아이는 늘 서운한 게 있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느낄 수 있는 기쁨의 가능성을 나로 인해 의심하게 만들지는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