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너희는 왜 결혼 안 해?”
15년을 연애하면서 우린 적어도 이 말을 300번 이상은 들었을 거라 확신한다. 한 사람당 1년에 10번은 넘게 들었으니 이 정도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는 말을 할 만하다. 이 말에 생략된 문구가 하나 더 있는데 (그렇게 서로 사이가 좋으면서)가 괄호 안에 들어있다.
그렇다. 우린 15년을 만난 ‘초장기 연애 커플’ 치고 믿기 어려울 만큼 사이가 좋다. 한 번의 이별이 있었지만 다시 재회한 이후 사이는 더 좋아졌다. 싸운 적도 거의 없고, 우리끼리 노는 게 여전히 제일 재밌다. 그런데 도대체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물어오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모르겠다. 때가 되면 하는 거고” 하며 상투적인 화법으로 어물쩍 넘겨 버리곤 했다.
2017년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우린 ‘결혼’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긴 했었다.
“정인아? 우리 결혼하고 세계여행 갈까?”
“글쎄 꼭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갇힐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우리가 결혼하고 여행을 가면 타국에서 싸우거나 실망을 하더라도 쉽게 헤어지고 그러진 않을 거 아냐”
“좀 싸웠다고 헤어지는 그 정도 관계면 더더욱 결혼을 하고 가면 안 되지!”
7년 전 잠시 집어 들었던 결혼이란 화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둔감해져 갔다. 결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좋기 때문에 더 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어렴풋하게 결혼을 하긴 해야 될 텐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생각에 빠지면 따라오는 책임감과 갖가지 복잡한 과정들이 무거워져 애써 외면하고 접어두었다.
그녀의 경우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묶이기보다는 평생 연애만 해도 지금 우리의 모습처럼 서로 사랑하며 지속될 수 있는 관계를 가장 선호하였다. 이렇게 사뭇 다른 생각들도 우리의 결혼이 정체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체된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23년 새해가 밝아왔다. 잠깐만! 그럼 이제 우리 나이가 몇 살인 거야? 내가 38살, 정인이가 37살? 맙소사. 덜컥거리는 마음과 함께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압박감을 유유히 해소시킬 아이디어!
“정인아? 너 내가 프러포즈하면 받아 줄 거야?”
“글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생각했어. 잘 들어. 올해 12월에 내가 너에게 프러포즈를 할 거야. 딱 1년 남았지? 1년간 충분히 생각해! 알겠지?”
“지금 프러포즈를 예고하는 거야?”
“응! 올해 12월에 난 네가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프러포즈를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동안 신중히 생각하고 나의 제안을 선택할지 말지 결정하면 돼. 중요한 건 거부해도 괜찮다는 거야!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그래 어디 한번 해봐”
나의 아이디어는 1년간 최선을 다해서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그 이후 모든 결정은 정인이가 할 수 있도록 ‘책임 전가’ 시키는 것이었다. 노력은 내가 할 테니 판단은 네가 해라 마인드가 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 시점부터 난 대한민국 지도를 펼쳤다. 1년은 12개월이니까 12회를 나누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뛰어가는 ‘국토종주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운동신경이 없는 나에게 유일한 강점이자 취미는 ‘오래 달리기’였다. 하루에 30km 이상은 달릴 수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예를 들어 1월에 서울 광화문에서 수원까지 달렸으면 2월에는 지난달 달리기를 마친 지점인 수원에서 다시 달리기를 이어 나갔다.
1년간 시간이 날 때마다 쉬는 날을 이용해서 달리고 달렸다. 준비물은 튼튼한 두 다리와 카메라 그리고 ‘우리 결혼하자’는 글자가 적힌 미니 현수막. 그렇게 겨울에서 시작해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달렸다. 길었던 우리의 연애 기간만큼이나 길고 험난한 프러포즈의 여정도 어느새 종착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 난 1년간 약 620km를 달려왔다. 오로지 그녀에게 당당하게 프러포즈할 순간을 위해서.
2023년 12월 7일. 그동안 달리며 찍어 둔 영상을 편집해 미리 준비해 둔 반지와 함께 프러포즈를 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내가 준비한 이벤트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무슨 놈에 프러포즈가 이렇게 고되고 힘들어. 이건 거부할 수가 없잖아”
“생각해 봤어? 1년 동안 충분히 생각해 보라 했잖아”
“생각할 게 뭐가 있어. 그냥 하는 거지. 하자 결혼!”
그리고 2024년 6월.
우리는 15년 만에 드디어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