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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입니다

by 낭만찬

10년 전 우리가 자주 가는 녹두빈대떡 집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며 정인이게 말했다.


“정인아? 너는 결혼 생각해 본 적 있어?”

“결혼? 생각해 본 적 없는데”

“......”

“그럼 난 어떡해?”

“뭘 어떡해. 지금처럼 잘 만나면 되지. 그런 법적 구속력이 없어도 잘 유지되는 관계가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

“아 그런 거 모르겠고, 나 그럼 나중에 나이 들어서 네가 나랑 결혼 안 해주면 평생 노총각으로 살란 말이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후우... 그럼 이거 하나는 약속해! 내 나이 40세 전 까진 결혼을 할지 말지 생각해서 말해주기로. 네가 결혼 생각이 없으면 나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야”

“빈대떡이나 먹어~”


30세가 되기 직전이었던 그 당시 난 그녀와 함께 할 안정된 미래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며 경각심 고취 차원으로 얄팍한 엄포를 놓았다. 결국 씨알도 안 먹혔지만...


이후 우리가 맞이했던 10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팔, 다리는 독립적으로 놀지만 결국 한 몸인 하나의 유기체처럼 잘 작동되게 만들었다. 변화된 시각 속에서 예전 나의 귀여운 엄포는 술김에 한 횡설수설 정도로 치부되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그 어떤 것일 뿐이었다.


그녀에겐 재밌는 구석이 있다.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이지만 이따금씩 기억하지 않아도 될 정보를 기억해버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그녀에게 오징어게임 ‘오일남’이라는 별명을 불러 놀리곤 하지만 때때론 등골 서늘하게 오랜 기억을 불쑥 꺼내어 놀랄 때도 있다.


“네가 40세 되기 전에는 대답해 달라고 했지? 이건 그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이야”


10년 전 술김에 했던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집안에 꽃길을 만들어 편지와 함께 그간 진하게 숙성시킨 묵직한 마음을 전했다.


담백한 결혼 : 결혼 준비


그녀의 별명을 ‘오일남’이라고 놀렸지만 사실 그녀는 ‘오일리스녀’가 맞다. 실용성과 귀차니즘 덕에 기름기 없는 담백함과 미니멀리즘이 그녀를 묘사함에 알맞은 수식어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명품 브랜드에 관한 지식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취향도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러블리하고 여성스러운 옷보단 가죽 재킷에 뾰족하고 번쩍이는 징 박힌 스타일을 선호한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 선물인데 처음으로 값비싼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서 혹시 원하는 반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정인이가 사진을 보내왔다.


“찬이야 프러포즈 링으로 이거 어때?”

“응? 너 이거 무슨 반지인지 알아?”

“몰라. 그냥 예쁘지 않아?”

“프러포즈반지로 크롬하츠...”

“아무리 봐도 내 만족도는 이게 제일 높을 것 같은데 말이지”

“이건 프러포즈 반지 말고 그냥 선물로 사줄게 다른 거 몇 개 더 보자”

“난 이게 마음에 드는데”

“정인아? 너 이 반지 이름이 뭔지 알긴 해?”

“아니”

“프러포즈 반지로 ‘퍽유링’ 반지를 원하는 너를 어쩌면 좋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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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낸 얘기 같지만 진짜다. 프러포즈 링으로 ‘퍽유링’ 반지를 고른 그녀다. 내가 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진짜 이상하다. 가짜 광인과 진짜 광인의 차이 정도랄까?


주위의 시선보단 자신의 만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 덕분에 우린 보통 사람들이 결혼할 때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들을 과감하게 줄이거나 생략할 수 있었다. 따로 예물이나 예단을 하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스튜디오 촬영도 생략했다.


우리가 결혼을 한다고 결정한 순간 양가 부모님의 일사천리 진행도 속도감에 한몫했다. 마치 테트리스 게임에서 긴 막대기가 나올 때까지 쌓여있던 블록들이 한 방에 해결되듯 상견례와 예식장, 결혼 날짜 등 대부분의 것들이 원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래 이제 너희 제발 결혼하기만 해주라.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라고 어머님들께서 입을 모아 말씀하신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가 세계여행을 하며 셀프로 찍었던 사진들을 웨딩사진으로 대체하였고 그녀는 쿠팡에서 구입한 드레스와 정장을 멋지게 소화하며 불필요한 비용을 아꼈다. 어느덧 우리는 웨딩홀에서 행진을 하고 있었고 15년의 연애는 결혼이란 새로운 챕터로 바통을 넘겨주었다.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

덕분에 행복한 감정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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