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창가에서, 운동장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홉 살 어린이는 무슨 전사라도 되는 양 비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두밭으로 달렸다. 얼굴로 빗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정신없이 주운 자두를 베어 물었다. 빗물 섞인 자두맛,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지금도 자두 철이면 그 자두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가 그림책 작가가 된다면 이때의 경험을 그림책으로 꼭 만들고 싶다.
어릴 적 나와 달리 요즘 어린이들은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유년기엔 비 오는 날에 놀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비만 오면 우산을 쓰고 나갔다. 식구들 우산을 몽땅 가지고 마당에 나가 우산텐트를 치고 논 적도 있다. 흙을 마구 파서 웅덩이를 만들기도 했다.
비를 맞아본 경험, 비와 놀아본 일이 없다는 건 몹시 아쉬운 일이다. 비 오는 날 멋진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그걸 놓치는 듯해서다.
'가브리엘 뱅상'의 <비 오는 날의 소풍>은 비가 주는 특별한 경험을 잘 그리고 있다. 생쥐 셀레스틴느는 곰아저씨 에르네스트와 소풍을 가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 꼭 비가 온다. 에르네스는 너무 속이 상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른다. 어쩔 수 없이 곰 에르네스트는 비 소풍을 떠난다.
처음에는 분명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에르네스트는 셀레스틴느처럼 어린이가 되어간다. 둘은 비를 맞기도 하면서 즐겁게 걷다가 숲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다 숲의 주인을 만나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 곧 숲의 주인과 어울린다. 멋진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해양 생물 학자 '레이첼 카슨'은 비 오는 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 오는 날은 숲을 걷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날보다 숲이 생명의 숨결을 세차게 내뿜는 날은 없다. 상록수의 가느다란 잎사귀가 은빛 모자를 쓰는가 하면, 양치류는 열대 숲의 무성함을 닮아가고, 숲의 모든 잎사귀와 풀의 끝자락에 맑은 수정 방울이 맺힌다. 겨자색, 살구색, 진홍빛...... 약간은 생소한 빛깔의 버섯들이 부식토 바깥으로 한껏 고개를 쳐들기도 한다. 숲의 전경이 아닌 배경을 이루던 이끼는, 푸른빛과 은빛에 젖은 신선한 자태로 전경이 된다.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37쪽
비가 올 때면 연례행사처럼 비를 보며 묘사글을 쓰거나 비 산책을 한다. 4학년을 담임할 때다. 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법 세찬 비가 내렸다. 이런 날 국어시간에는 일반적인 수업을 하기보다는 다른 걸 하는 게 좋다.
나의 유년시절엔 비 오는 날이면 약속이나 한 듯 이반 저반 선생님들이 모두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우리는 비만 오면 귀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선생님은 불을 끄고 커튼을 친 어둑한 교실에서 달걀귀신 이야기를 해주셨다. 별 내용도 아닌데 소리 꽥꽥 지르면서 들었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다.
어린이들은 모두 복도로 조용조용 나가서 창가에 줄줄이 섰다. 비를 느낄 수 있도록 창문을 살짝 열었다. 손을 내밀어 비가 손에 닿도록 했다. 틈으로 빗방울이 들이칠 만큼 비도 바람도 센 날이었다. 여름이지만 한기가 느껴졌다. 어린이들은 오감을 열고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어린이들이 비 오는 날, 일상의 풍경이 어떻게 바뀌는지 온몸으로 느끼기 바랐다.
비 오는 날 / 이예*(인천주안초 4학년)
비가 온다. 바람과 함께 온다. 소리는 바람과 함께 폭포처럼 요란스럽다. 빗줄기는 얇다. 잘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에 창문 사이로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의논을 하는 것 같다. 무슨 시간일까? 멀리서 아이들 소리가 진동으로 퍼진다. 화단으로 지나가신 꽃무늬 우산을 쓰신 할아버지께서 하얀 고무신을 신고 지나가신다. 비가 고무신을 씻어 주었다. 화단에 풀은 비를 맞아 이슬이 맺히고 유난히 반짝거린다. 또 진해지면서 흔들거린다. 꼭 나를 부르는 것 같다.(7.2)
비 오는 날 (안가*, 주안초4학년)
처마 밑에서 “후드득” 소리가 난다. 비에 젖은 꽃잎은 아름답다. 바람이 쌩 불면 비는 옆으로 내려온다. 시간이 갈수록 비가 많이 온다. 글을 쓰다 보니 어떤 아저씨가 우산과 하얀 보따리를 들고 지나간다. 건너편 1, 2학년 교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옥상은 비로 가득하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새들이 지나간다. 꼭 집을 찾으러 가는 것 같다. 내 옆 친구들은 “아이 추워”하고 말한다. 그 앞에는 5학년 언니, 오빠들이 가꾸는 꽃밭이 있다. 그 꽃밭이 바람에 휩쓸려서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뒤 건물에는 도우미 어머니께서 복도 청소를 하다가 수돗가에 가서 마포를 빠신다. 이 글을 쓰고 반에 들어가고 몇 분쯤 지나자 비가 멈추었다.(7.2)
건물에서 비 구경을 했으니 그다음은 비 산책이다. 5학년 어린이들과 비 산책을 할 때에는 산책이라는 말을 여행으로 바꾸었다. 국어 단원에 기행문이 나와서다. 기행문을 써야 하는데 우린 체험학습을 아직 가지 않았다. 각자 여행한 경험을 쓸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개인마다 경험과 사정이 달라 어려움이 있었다. 가족 여행을 멀리 가본 적 없는 어린이도 있어서 더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산책을 여행으로 바꾸고 운동장 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15분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나중에 보니 이 경험은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된 듯했다. 어린이들은 여러 해 학교를 다녔지만 스치듯 지나면서 제대로 보지 못한 나무와 꽃, 조형물,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어린이들은 여행의 맛을 느끼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겨 들고 15분간의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본관 느티나무부터 시작해서 화단 쪽으로 움직였다. 한 때 아름답게 피었던 작약과 모란은 지고 어느 것 얌전하게 초롱꽃이 피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순해지는 분홍 메꽃도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가늘게 내리던 비가 점점 굵어졌다. 잠시 빈 운동장을 감상하려고 멈추었다. 운동장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었다. 비가 오니 운동장도 쉬는 듯했다. 그 자리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와 운동장을 밟았다. 물쑥 들어가는 모래밭, 굵은 모래가 주는 감각이 좋았다. 어린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원형 쉼터에 도착했다. 담장 너머 도로변을 구경한 뒤 우리 반 나무인 목련나무를 보러 갔다. 여행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목련을 본 뒤 채송화 화단으로 갔다. 어린이 여러 명이 자기 화분을 들고 현관 쪽으로 급하게 채송화 화분을 옮겼다. 비를 너무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어린이들이 마치 병아리를 돌보는 엄마 닭 같았다. 그간 채송화 화분에 주었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채송화 화분 앞에서 우리의 여행은 끝났다.
여행을 마치고 교실로 올라와서 기행문을 한 시간 썼다. 다음 날 또 한 시간 글을 썼다. 두 시간 동안 글을 쓰며 기행문을 마무리했다.
<비 오는 날의 학교 여행> 김아*(춘천 남부초 5학년)
우리 반은 아침 10분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학교 운동장 여행을 하기 전에는 '그냥 산책이겠지, 하, 눅눅하고 찝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보니 공기가 눅눅하기도 하지만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우산과 폰을 준비물 삼아 들고나갔는데 비가 와서 놀랐다. 다른 친구들도 그런 생각인 듯했다. ‘비 안 오는데?'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느티나무 앞에서부터 빗방울이 떨어졌다. 파랑 빛이 좀 도는 연한 회색의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느티나무를 지나 돌나물, 초롱꽃, 그리고 농부들이 싫어하는 메꽂이 있는 화단에 왔다. 선생님은 메꽃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내 마음을 가꾸는 농부인데 이상하게 메꽂이 마음에 들었다. 나팔꽃 같은데 색이 연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오묘하고 우아한 색이다.
개교기념식수 동상이 있는 화단을 지나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무궁화 쪽으로 가다가 운동장을 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운동장으로 내려와 무궁화를 봤다. 예전보다 훨씬 컸다.
목련을 구경하고 채송화를 보러 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여린 싹들이 전멸할까 봐 신발장 쪽에 두었다. 우리 반은 짧지만 정말이지 좋은 추억을 만든 여행을 했다. 긴 15분 동안 느티나무도 보고 메꽃과 초롱꽃, 그리고 돌나물을 보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마지막으로 채송화도 보았다. 좋은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가이드가 되어 여정마다 설명을 했다. 비록 짧은 여행이지만 나름의 형식은 갖춘 셈이다. 완성한 글은 주말신문 여러 차례 나누어 실었다. 월요일, 주말신문을 답글이 왔다.
◾우리가 10분 여행을 한 것처럼, 짧아도 보람찬 여행이 될 수 있는 걸 알았다, 김아*의 기행문이 마음에 든다. " 파랑 빛이 좀 도는 연한 희색이라는 표현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효*의 기행문도 마음에 든다. 나도 학교 여행에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공감이 갔다.(김예*)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도 나름의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깊은 공감을 느꼈고, 비 오는 날 학교 주변을 산책하며 기행문의 형식을 배움으로 연결하는 선생님, 정말 멋진 경험이 되었을 거 같습니다.(김민* 어머니)
돌이켜보니 유년 시절부터 추운 날, 비바람 치는 날, 눈 오는 날, 새벽, 깊은 밤 가리지 않고 걸었다. 차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무조건 걸어야 했다. 옷이 젖은 날도 진장에 신발이 빠진 날도, 추워서 덜덜 떨던 날도 많았다. 힘든 날도 많았지만 그 모든 경험과 감각이 내게 쌓이고 쌓여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의 꽃씨 어린이들도 자연에서 수많은 경험을 얻기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님이 자녀와 함께 보슬비, 장대비, 밤비 등을 고루 경험하는 산책을 하면 좋겠다. 그런 경험을 한 뒤에는 비와 관련된 문장이나 장면이 나오는 책과 영화가 달리 보일 것이다. 남다른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