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있었다

산책길에 만난 여자

by 강승숙

날이 뜨거워지면서 밖에 나가는 일이 겁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타협을 했다. 공치천에서 마트까지는 다리 다섯 개를 지나야 하는데 끝까지 가지 않고 세 번째 다리에서 쉬기로 한 것이다. 내가 쉬는 동안 남편 혼자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 오기로 했다.


아이스커피에 얼음물, 모자에 긴 팔, 수건, 선글라스, 양산 등 온갖 채비를 갖추었다. 중무장한 전사처럼 차려입고 땡볕으로 나갔다. 천변 산책로에는 정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드물었지만 걷는 이도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꿋꿋이 걷기 시작했다.


며칠간 이어지는 더위에 지친 듯 풀들은 영 기력이 없어 보였다. 붉은 토끼풀꽃은 열기를 견디며 겨우 몸을 지탱하는 듯했고 개망초는 치고 올라오는 망초 꽃대에게 자리라도 물려줄 마음인지 더없이 쇠해 보였다. 개천 풀숲에서 개개비만 여전히 요란하게 울었다. 날씨를 타지 않는가 보다. 섬머슴아처럼 기운 좋게 객객 거렸다.


거쳐가는 다리마다 쉬면서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드디어 세 번째 다리까지 왔다. 나는 여지없이 배낭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남편이 다음 다리까지 가면 어떠냐고 물었지만 못 간다고 했다. 남편은 떠났고 나는 곧 의자에 벌러덩 누웠다. 교각 천정 곳곳에 비둘기들이 꾸물거렸다. 똥이라도 맞을까 봐 신경이 쓰여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렇게 있으려니 슬슬 잠이 왔다. 자다가 의자 아래로 떨어질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움직이는 거라고는 비둘기뿐이었다. 딱히 할 게 없어서 망연히 비둘기를 보고 있었다. 비둘기는 교각 아래 그늘에서 모이를 쪼다가 땡볕으로 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몇 번을 쪼아야 배가 찰까. 쉼 없이 먹어도 양이 찰 거 같지 않았다. 비둘기들은 교각에 연이은 비스듬한 축대 쪽으로도 올라갔다. 한 마리가 가면 우르르 몇 마리가 쫓아갔다. 거기라고 해서 먹이가 다를 것도 없을 듯한데 자리를 바꾸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먹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심심해서 옮겨 다니는 거 같기도 했다.


옆 의자에 앉은 여자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50대 초반 같기도 한데 나이 많은 사람처럼 계속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소리를 아주 높인 게 아니라서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난 계속 비둘기를 보았다. 뜨거운 포장길에 털썩 앉아 있는 비둘기도 있었다. 찜질하듯 배라도 지지는 건가 싶었다. 황톳길 따라 맨발로 걷다가 황톳길이 끊어진 구간이 있어서 어쩔수없이포장길을 걸은 적이 있다. 가마솥에 발을 넣은 심정이었다. 너무 뜨거워서 아악 소리지를 뻔했다.


그렇게 뜨거운, 무시무시하게 달아오른 무쇠솥 포장길에 비둘기는 털석하니 한참 앉아 있었다.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스물 남짓한 무리 중 한 둘만 그랬다. 늙은인가 싶기도 했다. 문득 몸에 둘러붙은 벌레를 지져 죽이려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입으로 벌레를 쪼아댈 기운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비둘기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옆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운동하러 나왔으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계속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리 아래에는 의자가 세 개 있다. 등받이 없는, 세 사람 정도 앉을 크기의 의자다. 나는 셋 중 가운데 의자에 앉았고 여자는 내 오른편 의자에 앉아 있다. 여자는 햇볕 가리개 같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데다 선캡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잠깐 쉬는 게 아닌 듯했다. 내가 오기 한참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거 같다. 앞으로도 한 시간은 더 있을 것으로 보였다.


여자의 폰에서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거슬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소리가 없는 게 나았다. 얼른 여자가 일어섰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여자 쪽을 힐끗 보는 걸 느꼈는지 여자도 나를 흘깃 보는 듯했다. 그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마트폰에 다시 몰입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여자를 탐색하고 있었다. 비구니나 수녀처럼 단정한 몸가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깔끔한 느낌은 또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고 간간이 웃는 것도 좀 특이했다. 유튜브애서 나는 소리가 노랫소리가 아니라 말소리였기 때문이다.


여자의 움직임이 과한 건 아니었다. 합창단이 노래하며 가볍게 움직이는 듯한 그런 움직임이었다. 유튜브에서는 계속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뭐를 듣는지 나도 들어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발음이 들릴 정도로 소리가 크지 않아 내용을 알기 어려웠다.


여자는 한 군데 방송을 오래 듣지 않고 채널을 자주 바꾸었다. 조금 듣다가 바꾸도 또 바꾸고 그랬다. 처음에는 무슨 연애 관련 유튜브를 보는 거 같았다. 유튜버는 남자였는데 남자의 유형이나 성격 그런 거에 대해 얘기를 하는 거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그런사이 여자는 시종 꼿꼿한 자세로 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는 듯 폰을 윗입술 정도 위치에 오게 해서 30센티 거리를 두고 보았다. 거북목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했다.


여자는 남방셔츠 깃을 바짝 세워 목을 가렸고 손도 반쯤 가리게 난방소매를 내려 입었다. 햇볕 차단을 하려는 의지가 견고해 보였다. 건강뿐 아니라 몸매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걸로 보였다.


여자가 입은 상의는 살구색 체크 난방이었다. 색이 바랜 건지 모르겠지만 좀 오래 입은 듯 했다. 반듯한 몸가짐에 비해 옷차림은 깔끔한 느낌이 덜 했다. 어쩌면 남방은 운동할 때만 입는 햇볕가리개 옷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내 눈길은 여자의 발에 가 닿았다. 뭔가 이상해서 다시보니 여자는 신발 없이 양말차림이었다.


신발이 어디 있겠지 하고 대강 둘러보았는데 신발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날이 뜨거워서 양말을 신을 수 있다. 하지만 황톳길도 아닌 포장길에서 맨발 걷기 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보통 사람들은 맨발 걷기를 해도 신발을 챙겨 온다. 집이 근처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신발이 안 보여서 의아했다.


여자가 신은 양말을 가만히 보았다. 양말만 신고 걸어온 듯, 흙가루가 묻은 흔적이 미세하게 감지됐다. 여자가 좀 일어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말만 신고 온 건지 아니면 내가 안 보이는 의자 저 쪽에 어디에 신발을 두었는지 보고 싶었다. 여자가 일어서기를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내가 일어섰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천천히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자연 여자가 앉은 의자 위아래가 다 보였다. 내가 안 보이는 쪽 의자에는 검정 우산만 있었다. 예상대로 신발은 없었다.


다시 궁금증이 일어난다. 어디서부터 걸어온 걸까. 군살 없는 날씬한 몸매라서 운동을 공들여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운동을 하는 사람치고는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덧 삼십 여분이 지났다. 남편이 마트에서 올 시간이다. 심심하여 여자에게 말을 붙여볼까 생각도 했는데 여지를 주지 않는 거 같아 그만두었다.


멀리서 남편이 건너오라고 부른다. 그대로 일어서려니 뭔가 서운하다. 결국 여자보다 늦게 온 내가 먼저 일어섰다.


여자를 또 만나게 될까. 다시 만난다면 인사도 하고 말도 붙여 볼 생각이다.


몇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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