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요일 필사 : 임복순 시인의 동시<구워삶기>
늦은 밤, 내일이 시요일이다. 아직 시를 고르지 못했다. 조금 초조하다. 시간이 부족하면 적당히 시를 골라 타협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상에 여러 권 시집을 쌓아놓고 읽는 중인데 좀처럼 잡히는 시가 없다. 일단 너무 긴 건 고르지 않는다. 필사하는데 시간도 걸리지만 시를 받는 선생님들도 아침시간에 긴 시를 읽을 여유가 없다.
다시 책장으로 간다. 어린이가 쓴 시집 두 권을 찾아왔다. 매미, 채송화, 구름 같은 시가 눈에 들어온다.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뒤로 간다. 다시 처음올 돌아와 고른 시들을 읽어본다. 조금씩 아쉽다.
- 좀 유머스러운 시면 좋겠는데......
남편이 내가 고른 시 두세 편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 그러고 싶은데 그런 시가 잘 안 보여서.....
월요일 아침 독서모임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후배 교사들은 2학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어린이들도 교사 자신도 방학 생활에서 벗어나 학교 시간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돌아보면 나의 40년도 그랬다. 이럴 때 웃음을 주는 시 한 편은 묘약이 되기도 한다.
다시 책상으로 갔다. 시집이 아닌 어린이 비평지에 실린 시를 읽어보았다. 창비어린이 2023년 봄호다. 동시코너에 실린 시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책장을 넘겼다. 다행히 특집이 동시라서 동시가 푸짐하다. 스무 편도 넘는다.
시를 읽는다, 넘긴다, 읽는다, 넘긴다, 맘에 맞는 시가 나와야 하는데 나와야 하는데, 드디어 만났다. 임복순 시인의 '구워삶기'다. 시는 순식간에 나를 구워삶았고 나는 필사를 시작했다.
10시가 넘어가면서 눈꺼풀이 내려가고 손도 감각이 둔해진다. 이른 새벽에 일어난 탓에 졸음이 쏟아진다. 지금쯤 이불속에서 뒹굴거려야 한다. 시를 필사하려니 감각이 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려고 애쓰지만 자꾸 글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중심을 못 잡는다.
시를 필사하는데 자꾸 웃음이 난다. 오래전 어머니가 쪄온 퍼슬퍼슬한 감자를 먹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때 소금을 찍어먹더니 나중엔 설탕을 찍어먹기도 했다. 두 분 다 맛나게 감자를 드셨다.
지인이 보내준 감자를 여름 내내 즐겨 먹던 일도 떠오른다. 하루는 감자채 볶음, 하루는 감잣국, 다른 날은 감자고추장 조림, 또 다른 날은 밥 할 때 감자를 넣고 쪘다. 감자는 아직 십여 알 남았다. 감자전을 해 볼 생각이다.
시 감상을 쓰려는데 졸려서 몽롱하다. 예민한 정신으로 그럴듯하게 감상을 쓰고 싶은데 생각이 오리무중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마지막 연 '감자가 나를 확실하게 구워삶아 놓았어'를 읽으면서 나를 삶아 놓은 것들을 적어보았다.
밥, 된장국, 총각김치, 쫄면, 어린이가 쓴 시,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귀신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더 있다. 비 오는 날 자두밭에서 주워 먹던 자두, 목포 이모가 새벽에 우리 형제 이름을 부르며 머리에 이고 온 온갖 음식들......
살아오면서 구워삶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적어보았다. 날마다 만나는 어린이들, 그 어린이들과 마음이 딱 맞아 수업하던 날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색깔의 여왕>이라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수업했던 날이다.
우리는 그림책 속 색깔의 여왕이 했던 몸짓을 확장하여 다양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짓을 색종이와 색연필선으로 도화지에 표현해 보았다.
- 선생님, 그림책을 읽고 어떻게 이런 활동하실 생각을 했어요! 저, 어른 되면 이 방법 써먹고 싶어요!
아이가 내게 해 준 최고의 찬사였다. 영 박자가 안 맞는 날도 있었다. 먹구름이 낀 듯한 날들이 수날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때는 내내 수업도 딱딱했고 가슴도 답답했다. 어린이들을 제대로 구워삶지 못한 날들은 저녁이 더 쓸쓸하고 컴컴했다.
애쓰다가 행복하다가 힘겹다가 하면서 퇴임을 했다. 이제 수업은 끝났다. 나는 누구를 무얼로 구워삶을까. 음식을 잘해서 남편을 구워삶아 볼 생각이다. 오래 일하면서 음식 솜씨는 답보상태다. 이제 새로 배우는 마음으로 1일 1찬을 하려고 한다.
뻔해 보이는 흔한 반찬부터 하나씩 정성껏 해보고 있다. 남편은 무조건 맛있다고 한다. 확실하게 구워삶은 거 같다. 아니 남편이 칭찬 한마디로 나를 구워삶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구워삶아야 할 이들이 있다. 시요일 지인들이다. 시요일에 필사한 시를 선물해서 그들의 마음을 구워삶고 싶다. 다행히 벌써 구워삶아졌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꽤 있다.
기분 좋은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받기 위해 시를 고르고 필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요일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안부도 듣는다. 6학년을 담임하는 후배 선생님이 답장을 했다. 코로나로 고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코로나에 걸린 뒤 6개월씩이나 어지럼증으로 크게 고생한 나로서는 코로나 말만 들어도 겁이 난다. 후배선생님이 빨리 기운을 찾아 다행이다.
원주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답장을 보내왔다. 시요일에 시를 보내고 나면 원주 선생님 답장을 은근이 기다린다. 원주 선생님의 답장은 늘 새롭다. 그러그러할 거라는 답장의 예측을 벗어난다. 진실함과 낭만, 순수함이 묻어 있다.
살면서 누군가를 구워삶아 본 적이 있나, 또 누군가가 나를 구워삶아 보게 한 게 있나 싶어요. 사는 동안 내가 많은 벽을 치고 살았나, 쉽게 보이지 않으려고 했나, 본래 좀 차가운 사람인가. 1일 1찬으로 노선생님을 구워삶을 수 있으시다니 선생님의 음식 솜씨가 무척 놀랍습니다. 아니면 노선생님이 너무 무른 사람이라 작은 열기운(사랑?)에도 구워지고 삶아지시던가요^^ 시요일이 수요일을 참 즐겁게 시작하게 합니다. 시요일의 시가 나를 구워삶아 놓고 있나요^^
서두의 몇 문장은 여러 번 읽으면서 곱씹게 된다. 한 때 내가 구워삶았다고 생각한 이들의 이름을 적어보기도 했다. 열, 스물, 서른 명...... 나는 사람부자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인천에서 강원도로 이사를 온 뒤 관계에 대한 체감이 달라졌다. 가깝다고 생각한 이들과 차차 소원해졌다. 만남도 전화도... 서서히 끊어진 이들도 있다. 섭섭한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굳이 인연을 이어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아끼는 후배교사에게서 답장이 왔다.
* 내가 구워삶고 싶은 것들
- 우리 반 아이들의 흥미
- 남편에게 보여주는 독립심
- 놓치지 않고 쓰는 일기
* 나를 구워삶아 놓는 것들
- 아침에 먹는 아이스라테 커피
- 신혼 일상
- 엉뚱한 얘기하고 배시시 웃는 우리 반 애기들
시 한 편으로 자신의 마음과 일상을 이렇게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은 거 같다. 조만간에 우린 그림책 한아름 안고 그동안 쓴 일기도 챙겨서 만날 것이다.
책을 늘 손에 쥐고 사는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보낸 답장이다.
저는 저를 구워삶는 책들이 참 좋아요.
유튜브에 날마다 구워삶아지고 있는 게 고민이라는 후배 교사 답장도 있었다. 학교에서 지치고 돌아와 살림하고 밤이 되면 멍 때리며 유튜브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 같다.
시를 받고는 이렇게 자신의 일상을, 마음을 전달해 주는 소박한 지인들 덕분에 내 마음 또한 구워삶아지곤 한다.
벌써부터 다음 주 시요일 시 찾을 생각에 마음이 부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