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섬이야기(66)

쑥섬에는 '초분골'이 있었다

by 명재신

쑥섬에는 ‘초분골’이 있었다.



쑥섬에는 ‘초분골‘이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직도 ‘초분골‘이라는 이름은 존재를 합니다. 다만 ’꽃섬’과 ‘고양이섬‘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아서 잘 안 쓰고 있을 뿐입니다.


‘초분골’은 지금의 ‘우끄터리‘에 있는 ‘동백나무숲‘이 바로 그 숲입니다.


‘초분골’은 그 이름만으로도 무섬증을 유발하는, 일테면 주검이 존재하는 숲이라하여 쑥섬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그 숲을 지나칠 때면 종종걸음으로 얼른 지나치려고 했던 숲입니다. 그 옆에만 지나가도 뭔가 으스스한 기운이 숲에서 나온다 해서 아무 때나 그 숲을 지나가기를 주저했던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초분골에는 초분이 있었다?'


예 맞습니다. 실제로 그곳에는 초분이 존재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더 많은 초분이 써져 있었을 것인데 적어도 저희들이 커 나오는 시간대에는 초분 두어 동만이 남아 있었고 나머지 초분들은 주로 ’작은섬’과 ‘목넘애’ 양지바른 곳에 많게는 네댓 동이 늘 모셔져 있었습니다.


짧게는 2~3년을 모셨다가 묫자리가 구해지면 다시 ‘이장’을 하였고 많게는 5~6년을 모셨다가 이장을 하였습니다.


초분(草墳)은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관을 돌축대나 평상 위에 놓고 이엉(짚이나 풀)으로 덮어두는 매장 방식입니다.


쑥섬에서 초분을 쓸 때 실제로 지켜 본 적이 있었는데,


우선 납작하고 제법 큰 갯돌들을 주워다가 먼저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큰 갯돌 위로 더 작은 갯돌들을 끼워넣어 평평하게 만든 뒤에 고인의 관을 놓고 주변으로 갯돌들을 다시 둥그렇게 쌓고는 초가지붕을 이을 때 쓰던 짚으로 만든 '볏집이엉'으로 둘러서 비가 안으로 새어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볏집이엉'은 매년 새로 해 주었습니다.


초분은 남해안의 도서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중장례‘ 풍습이었습니다.


‘가장(假葬)‘과 ’본장(本葬)’으로 나누어 장례를 치른다는 말입니다.


‘가장(假葬)’은 이름 그대로 ‘임시로 모시는 유택(幽宅)'입니다. '본장'을 쓰기 전까지 임시로 모셨다가 2~3년 뒤에 유골만 수습을 해서 좋은 날과 좋은 곳을 택하여 장례를 치렀던 풍습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임시로 모시는 가장’을 택하였는지가 여러 민속학자들의 관심사항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주로 도서지방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테면 쑥섬 같은 섬에서는 묘를 쓰지 못하게 하는 규율 때문이었습니다.


쑥섬은 작은 섬이어서 살아있는 자손들을 위해서 죽은 이들의 무덤으로 얼마 되지 않은 땅을 쓰지 말자고 만든 쑥섬만의 오랜 규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누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 쑥섬이 아닌 나로도 본섬이거나 고흥반도 어디에 장지를 정해야 하는데 출상하기까지 쉽게 아무 곳에나 장지를 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유택을 정하기까지 ‘가매장 방식‘인 ’초분‘을 썼었고 ‘마땅한 곳‘이 구해지면 다시 ‘윤달’이 도래하는 좋은 날을 택하여 다시 한번 장례를 치르는 풍속이었습니다.


다른 경우로,


섬에서 천수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시게 되는 노 부모님의 경우라도 상주가 먼바다에 나가 있게 되면 보름 만에 들어오는 상주를 기다려서 상을 치르게 하기 위하여 ‘가묘’를 쓰게 하는 것도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상주가 삼재가 드는 해에나 묘를 쓰는데 좋은 해가 아닌 경우에도 ’가묘’인 ‘초분‘을 썼다는 설도 있기는 한데 도서지방의 특수성과 연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쑥섬에는 묘가 없었다?’


사실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쑥섬에도 묘는 있었습니다. 초분 말고 봉분을 쓴 무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은 이장을 해서 없기는 한데 ‘우끄터리’ 초입에 무덤인지 아닌지 육안으로 잘 구분하기 힘들 만큼의 봉분으로 쓰여져 있던 무덤 한 동이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초분골’에 있던 초분과 함께 우끄터리에는 무덤 하나가 존재를 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떤 이유로 마을에서는 그 무덤을 쓰는 것을 예외로 허용을 했는지는 지금은 알 수가 없으되 그곳을 제외하고는 쑥섬의 어느 곳에도 무덤을 쓴 사례는 없었다고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초분을 쓰는 풍속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고맙고 감사할 일입니다.


쑥섬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자손들을 위해서 죽어서도 양보를 하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어서 입니다.


자신의 유택을 위하여 자손들이 일궈 먹어야 하는 밭자리를 점유하여서는 안된다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누대에 걸쳐 그렇게 밭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살아있는 자손들이 일궈 먹어야 하는 땅은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부모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산 자들은 죽은 이들의 더 나은 유택을 위하여 이중장례의 풍속을 선택을 했던 거구요.


이제는 그 누구도 쑥섬에 실재하고 있는 ‘초분골‘을 이름하지 않습니다.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실은 그 숲은 쑥섬을 살다 간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숲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모두 사라진 풍속이지만 말입니다.



초분골


밤의 그만그만한 시간이 되면

적당히 주름 잡힌 아낙들

불을 켜들고 집을 나선다?


불을 보면 웬일인지 눈물이 나


소지燒紙하던 불 기어코 온 머리에 당겨놓곤

종이 타듯 종이 타듯

화-,


불의 아낙들 모여들어

영등사리 관능의 개펄에서

죽어서야 찾아오는 지아비들

혼을 부른다고 넋을 건진다고?


쑥섬에 가면

초분골*에 가면 지아비 따라

불이 된 지어미


초분 한 덩이 눈물처럼

뚜욱 떨어져 있지.


출처 : 제4시집 '쑥섬이야기' 중 48 페이지

*초분골 : 쑥섬에는 오랜 규약으로 가장假葬인 초분만이 정해진 장소에 허용되었다.

초분은 통상 2~3년 뒤에 나로도 본섬이나 뭍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여기 보이는 숲이 초분골입니다. 지금은 ‘동백꽃길‘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에는 초분골 앞에서 '쑥섬이야기' 걸개 시화전을 했었습니다.
온전한 초분의 모습입니다. 옆에 폼잡고 서 있는 사람은 젊을 적 필자입니다. 어쩐 일로 초분 옆에서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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