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돌의 잠을 깨우거라'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요?
억겁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저 자리에, 저 모양으로 자리를 하고부터 셈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어느 시간대부터 무수의 생명들이 저들을 지나가거나 머물다가 갔을 겁니다. 쑥섬에서 살다 간 모든 생명들은 저들 바위 곁에서 혹은 아래에서 또는 위에서 함께 하였을 겁니다.
그리고서 인기척이 있었을까요?
어찌 보면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는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간대였을 겁니다. 기억할 수 없는 시간대에 존재하였던 생명들과 함께 한 시간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도 우리는 다 알지도 못하고 다시 쑥섬을 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쑥섬이라는 조그마한 섬에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누대에 걸쳐 만들어 온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그나마 그 이야기들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저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와 사연과 내력에 얽힌 이름을 아주,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합니다.
나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무명의 바위들이, 익명의 존재들이 그냥 저기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저 바위 위에서는 누가 앉았다가 떠나갔을까요?
알고 있는 이름과 그 이야기들을 해 보면서 앞으로 만들어 갈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첫번째 바구’입니다.
우끄터리길로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저 ‘바구’에서 우린 처음으로 험한 세상을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을 했었습니다. 우리 유년의 시간대에는 저 바위 위에 오르는 것으로 세상 높은 곳은 다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자신 했었습니다만 저는 저 바위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저 경사를 타고 오르면서 세상의 비탈길은 모두 다 자신만만하게 오를 것이라 장담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비탈길에서 넘어지고 기를 쓰고 오르던 저 바위만 같은 세상살이에서 얼마나 미끄러지고 떨어져 내려왔을까요.
만만치 않은 세상을 저 바위는 일찌감치 깨우치게 했었을 것인데 오늘은 무명의 저 바위는 누구에게 한 말씀 건네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입을 열지 않고 아직도 묵언수행 중인 걸까요.
'빠꿈살이/소꿉놀이'을 할 적에는 저 세 번째 바위 옆에서 '한살림 걸게/거창하게' 차려서 '신랑각시' 놀이를 했었습니다. 함께 살림을 차렸던 신랑 각시는 지금 어디에서 나이를 먹어가고 있을까요? 바지락 껍데기에 차린 진수성찬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터지요.
모두가 무심히 지나가는 우리들의 진수성찬이 자리한 저 바위는 오늘도 누군가가 찾아와서 한 상 거나하게 차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바위는 아직도 빈 상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지나는 걸음 잠시 멈춰서 거기 빈자리에서 시간을 되새김질하노라면 조용하게 그 옛날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해 내고 있을 겁니다. 잔잔하게 들리는 해조음을 배경으로 말입니다.
저 '뱀바구'는 어떤가요?
뱀을 잡으면 언제나 '뱀바구'에 가서 '처단'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쑥섬사람들은 집에 무언가를 태워버릴 일이 있으면 항상 저 '뱀바구' 아래에서 태웠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의 옷가지를 태우던 곳이 저 바위 아래였습니다. 쑥섬에서 가장 '궂은일을 감당해야 하는 바구'였으니 아마도 저 바위는 누대에 걸쳐 그 몫을 감당하느라 늘 '아픔으로 사는 바구'였을 겁니다.
지금이야 태울 것이 있으면 '작은섬 목넘애'로 가서 태우지만요. 지금도 저 바구 옆을 지나면서 보면 오랜 시간 '아픈 시간'들의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태생부터 '뱀바구'라는 이름을 갖지는 않았을 테지요.
방파제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갈매기 도팎'은 단연 돋보이는 풍경 속에 우뚝 서 있던 바위였습니다.
늘 갈매기들이 지친 날개를 잠시 접어 쉬어가는 바위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갈매기 도팎'입니다. '도팎'이라는 말은 '돌'이라는 말인데 조금 커다란 바위를 지칭하는 현지어입니다.
쑥섬에서 사는 온갖 바다 날짐승들은 저 바위 위에서 지친 날개를 잠시 접고서는 머언 길을 마저 날아갔을 겁니다. 더러는 '서바닥'으로 먹이사냥을 나갔을 테고 일부는 머언 남쪽이거나 북쪽으로 비행을 하였을 것입니다.
갈매기, 왜가리, 가마우지, 슴새, 섬비둘기, 바다제비, 흑비둘기----
그들이 전해주고 간 세상이야기를 무심하게 듣고서는 어디에 그 이력들을 기록하거나 기억하고 있을까요. '갈매기 도팎'의 저 속에는 무슨 이야기가 가득 차 있을까요.
쉬었다가 떠나간 모든 생령들에게 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저는 그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파계
저 돌들의 잠을 깨우거라
큰산이 몸을 풀어
우끄터리 갯가에 무수의 세월로 살고 있는
저 깊은 잠을 깨우거라
손마디 굵어진 큰산 황죽이
마디마디 갇혀 있는 계가 보이는가
날을 세워 자르거라
다듬어
백 년의 꽃을 피우고도 저렇게
소리 없는 시간으로 살고 있는
울음을 꺼내거라
황죽의 입을 열어
소리로 일어 서거라.
‘큰산’은 한때 쑥섬에 존재했던 바위산이었습니다.
어느 시기에 그 ‘큰 바위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끄터리’ 바위들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이야기를 만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무수로 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시원의 시간대에서부터 저 모든 바위들은 지금껏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을까요?
저들의 몸체 안에는 어떤 묵음들이 주저앉아 있을지요.
저들이 갖고 있는 이름을 묻고 그리고 이름에 얽힌 그간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삼바구'와 같이 말입니다.
쑥섬의 어린아이들이 멲을 감을 때 타고 놀던 놀이기구의 역할을 했던 '삼바구'는 언제부터 쑥섬의 어린아이들을 키워 냈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묻혀 길이 되어 있을까요. 저 자리에 있던 '삼바구'는 '우끄터리'로 가는 길을 넓힐 때 '채움돌'로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돌을 싣고 온 '바아지'가 접안할 때 걸림돌이라고 해서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유년시절의 친구 '삼바구'와 같이 말입니다.
쑥섬의 '바구'들이 갖고 있는 이름만으로 무수의 시간 속의 내력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천문학자들이 우주 속 모든 행성에 이름을 부여해 주고 있듯이, 쑥섬 갱본 바닷가에 나름의 공간을 가지고 남아 있는 바위들이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는 내력들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익명이 아니라 실명의 존재로서 함께 무언의 공감각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때 쑥섬을 살다 간 뭇 생명들의 안식처였으며, 객지로 떠돌다가 어쩌다 들어가면 반듯이 찾아 오르고 그간의 안부를 여쭙는 저 오랜 세월들에게 더 얼마를 가야 소멸로 향하게 되는지,
뭇한 파두의 끝에서 마멸하거나 깨어져 더 작은 개체로 떠돌아다니다가 몽돌이 되어 파도와 함께 뒹굴다가 조약돌이 되는 시간을 경유하면 어느 날 서바닥에서, 동바닥에서 진하디 진한 갯벌로 침전되어 있을 시간까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씀이라도 올리고 싶었습니다.
‘갈매기 도팎’, ‘뱀바구’, ‘삼바구’, ‘노래미 도팎’…
산과 들에 피는 온갖 꽃들도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그저 ‘들꽃’이지만, 그 들꽂들 또한 이름을 가지고 있듯이 찾아보고 알아보면 뭇한 생령들이 붙여주고 불러주었던 오랜 이름이라도 찾아낼 수 있게 되기를 말입니다.
묵음으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찾아보고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저라도 아니면 누구라도 그들에게, 쑥섬의 ‘우끄터리’에 잠들어 있는 모든 바위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붙여 주었을 법한 이름들을 말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듯이 새 이름을 주면 저들은 새로운 시간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돌들의 잠을 깨우거라.
그들도 하루하루 햇볕을 받고 파도를 안으며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숭어도팎’
잊혀진 이름과 새롭게 지어질 이름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말입니다.
쑥섬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시간대에서처럼.
우리가 사진을 찍고, 그들이 내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무수한 은하들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