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안 감나무에게
‘뒤안 감나무에게’
고향집 뒤안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수령이 많은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무척이나 아끼던 감나무였습지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어렸을 때에도 그 감나무는 늙은 감나무였다고 했으니 오래된 것은 맞은 거 같은데 수령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그 늙은 감나무는 감꽃을 하늘의 별처럼 많이도 피웠지요. 아침에 뒤안으로 돌아가보면 별들이 밤새 떨구어 놓은 '별똥'들처럼 남새밭과 뒤안에 가득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감똥'이었습니다.
군것질 거리가 적었던 시절, '감똥'은 어린 쑥섬 아이들에게는 요긴한 군것질거리였습니다.
탈곡을 하고 난 보릿대에 '감똥'을 끼워 만든 '감똥 목고리'를 의기양양하게 목에 걸고 학교에 가기 위해 나룻배를 타러 선창으로 나서면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쑥섬에는 감나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나로도항으로 향하는 나룻배에서 형제의 목에 걸린 '보릿대 목고리'에서 '감똥'을 하나둘씩 빼서 나누어 먹던 그 의기양양함이란 단연 최고였습니다.
뒤란 감나무
늘
저만치 가시는 아버지 모습 쓸쓸합니다.
빈 고향 집 뒤란 감나무
밤새 목이 쉬도록 휘파람으로 인적을 부르고
그 기나긴 시간을
아직도 빈 집 마당을 홀로 걷고 계십니다.
지쳐
잠시 바람이 그치면
깊은 밤 빈 세월을 허허로이
맥을 짚다가
깊은 외로움 한 말 술로 다스리는
저기 페르시아만 이른 새벽 거친 바람 지나듯
아버지가 켜둔 불꽃 미명으로 일어나고
바람 한 자락 다시 지나 갑니다.
묵은 감나무 감꽃은 피어
비인 뒤란 남새밭 가득 별똥별로 떨어지고
초록 그 위로 별이 꽃으로 환생합니다
출처 : 제4시집 '쑥섬이야기' 100 쪽에서 인용
'고양감'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창 친구네 집에 열린 감은 '떠발이 감'이라고 해서 납작한 감이었는데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단감이었던 것 같은데 저희 집에 있는 감은 작고 씨가 많은 감이었습니다.
무수의 감꽃을 매단 만큼이나 감도 많이 매달았습니다.
아침이면 뒤안에는 시퍼런 감들을 감나무 스스로 떨구어 내어 놓았는데 아버지는 그것들도 하나하나 챙겨서 '오가리/옹기 항아리'에 물을 담아 놓고 거기에 담구어 두어 떫은맛을 빼서 저희가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맛이야 있건 없건 그 시절에는 아버지가 어릴 적에 그랬듯이 저희도 내림으로 그것들을 '일어서/떫은 맛을 빼서' 먹었드랬습니다.
뒤안 감나무는 태풍에도 끄떡없었습니다.
쑥섬은 지형적으로 태풍이 오는 방향으로 면하고 있어서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선 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바닷물을 함께 날려서 나뭇잎이고 곡식들이 '갱기/바닷물의 소금기'를 이겨내지를 못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모든 곡식들이며 나뭇잎들의 이파리가 검게 타 버렸는데 이 때문에 쑥섬에는 과실나무가 많지 않았음에도 뒤안 감나무는 끄떡없이 살아남았고 거기에다 매달고 있는 감들도 거의 지켜내었습니다.
선대 어른들은 그것이 고마워서 오랜 시간 집안을 지키는 나무로 받들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감‘은 크기는 작고 씨는 많았으되 홍시가 되면 맛이 좋았습니다.
가을에 감을 수확을 하게 되면 ‘겉보리’를 저장해 놓는 커다란 ‘독아지/옹기 항아리’에 넣어서 홍시를 만들어서 겨울에 꺼내 먹었습니다. 더러는 곶감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씨가 많아서 과육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과일이 귀한 섬에서는 그나마 우리들의 겨울 군것질거리로는 제격이었습니다.
해서 동네 아이들도 호시탐탐 감을 노렸는데 그것은 바로 윗집으로 가는 길에서 손만 내밀면 쉽게 감나무 가지에 열린 감을 서리를 할 수가 있었고 나무를 잘 타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밤이 되면 ’추렴‘을 하는 아이들에게 많이 털리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감나무를 지키겠다고 실 끝에 깡통을 달아서 마루에 놓고 그 실을 감나무 주변에 이리저리 그물처럼 쳐 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밤에 감 서리를 하러 드나드는 아이들이 그 실을 건들면 마루에 놓아둔 깡통이 소리를 낼 것이라는.
감나무의 최고 수령은 얼마나 될까요?
국내 감나무의 평균 수령은 200~300년이라고 합니다만 국내에 최고령 감나무는 500년이 넘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뒤안 감나무는 수령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저희 집은 대대로 물림을 해온 집인지라 선대 어른 어느 분이 심은 것으로 보면 기록 상으로 입도조(入島祖)께서 최초 1751년에 들어와서 정착하고 씨족을 형성하였다고 나오니 200년은 넘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오래된 감나무가 올해에는 잎을 내지 못했습니다.
오월에 가족들과 함께 찾아든 고향집을 찾아 '감똥'을 주워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뒤안 남새밭을 찾았더니 이파리를 내지 못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저를 맞았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고향집을 지켜오고 많은 자손들을 내어 보내었던 감나무도 수명을 다하고 거기 홀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손으로 쓸어도 보고 가슴으로 안아도 보고 그리고 볼을 대어 부벼도 보았습니다.
집안을 지키시던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감나무를 아끼시던 아버지도 떠나보내고 그리고 남새밭을 지키며 오다가다 고맙다고 비손을 하던 어머니도 떠난 빈 집을 홀로 지키던 나이 많은 감나무도 외로움을 홀로 지키다가 어느 시간에 홀로 떠나갔던가 봅니다.
마당으로 나와서 절을 올렸습니다.
'고맙고 감사하요'
큰 절을 두 번 올리고 할머니가 그랬듯이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머니가 그랬듯이 합장을 하고 우리 집안을 대표해서 절을 거듭 올렸습니다.
'오랜 시간 우리 집안을 보살펴 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