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섬이야기(70)

풍선(風船)_한국전쟁_1/4

by 명재신

풍선(風船)_한국전쟁_1/4



바람이 바뀌고 있었다.


"돛을 내려라"


하늘바람이 멎었다. 물때는 여덟 물. 섬이 희끄무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람이 세마바람으로 돌고 있었다.


'풍선(風船)/돛으로 움직이는 어선' 3척을 기운차게 끌고 가던 기선(汽船, 증기선)의 연통에서 검은 연기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목포에서 출발해서 부산으로 가는 화물 운반선인 기선이었다. 나로도에 기항을 했다가 잡혀왔다고 하는 기선은 중유를 쓰는 왜정시대 상선으로 쓰이던 낡은 철선이었다.


그 뒤에는 쑥섬에서 징발된 풍선(돛단배) 세척이 줄을 달아서 줄줄이 끌려가다시피 따라가고 있었다.


"썰물이 나가기 시작했어라"


이물에서 고물로 넘어온 사촌동생이 그랬다,


맞바람에 조류가 반대로 흐르고 있으니 배들의 속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풍선을 끌고 있는 기선이 힘겹게 연통에서 검은 연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김소장이 조타실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왜 이리 속력이 늦나!"


"썰물에 맞바람이어서 돛을 내려서 그라요"


"여기가 어디쯤인가?"


"사량도에 접근 중이요"


"사량도면 충무 근해라는 이야기인데..."


사복 복장을 한 그를 다들 소장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함께 내려온 몇 명의 젊은 사람들과 100여 명이나 되는 남녀노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다들 질린 표정이었고 무언가 단단히 주의를 받은 듯 선원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어창(魚倉)/물고기를 보관하는 고깃배의 창고'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들은 전남도와 광주에서 전쟁을 피해서 내려온 군경 가족들과 그들을 인솔하는 군경 몇 명이었다. 인솔을 하는 '소장님'이라는 40대 초반의 인솔자 외에도 4명의 젊은 군경, 공무원인 듯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각각 배에 1명씩 나눠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다들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담요를 덮고 웅크린 어린아이들과 초중학생 정도 보이는 학생들과 벽에 등을 붙이고 앉은 노모, 남루한 옷으로 바꿔 입은 듯싶은 젊은 어미들이었다. 다들 보퉁이를 껴안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것을 안 것은 상포(上浦)에서 그들을 싣고 기선에 3척의 풍선에 줄을 잇고 함께 출발하고 난 뒤였다. 자기네들끼리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서야 난리가 난 줄을 알았다.


싣고 올 것으로 기대하였던 식량 대신에 서너 대에 나눠 타고 온 1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 배가 상포 선창에 닿자마자 우와하고 몰려들었고 인솔자들은 그들이 타고 온 낡은 버스와 트럭과 차량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여 버렸다.


그제야 우리는 그 난리가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를 않았다. 불과 몇 년 전에 여수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난리로 해서 누구로부터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고흥조차도 그들에게는 안전하지를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 마을회관으로 모이씨요!"


쑥섬 마을회관에서 긴급회의가 있다고 나룻배 사공이 커다란 소리로 외친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더 정확히는 1950년 6월 30일이었다. 전쟁이 나고서 닷새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미 서울은 인민군에게 넘어가고 우리 군은 속수무책으로 남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식량을 실러 가야 한다고 쑥섬마을 청년들을 마을회관으로 모이게 했다.


"상포에 가서 식량을 좀 싣고 와야 하니 배 3 척하고 젊은 청년 10명을 선발해 줏씨요"


면서기가 쑥섬까지 건너와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해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국에 쑥섬도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들은 식량을 풍선 3척에 나눠 싣고 와야 한다고 쑥섬 사람들에게 그랬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나이가 20세~25세가 된 청년들을 모이게 해서 당시에 장마가 막 시작되고 휴어기여서 배들이 다들 들어와 있어서 배를 타던 젊은 쑥섬 청년들이 20여 명 남짓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상포(上浦)는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포구의 이름이었다. 쑥섬에서 뒷바람을 받으면 한나절이면 가는 거리였다.


마침 쑥섬마을 선창과 선창 안쪽 '갱본/갯가'에는 충청도 지방에서 봄 조기잡이가 끝나고 여름 휴어기가 되어서 쑥섬에서 출어를 했던 크고 작은 풍선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배 3척은 선주들이 쉽게 내어 놓았다. 식량을 싣고 오면 배 운임비로 넉넉하게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각각의 문중에서 어른들이 선선히 큰 풍선 3척을 내어 놓았다.


문제는 젊은 청년들이 뭔가 낌새를 채고 뒤로 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해방 전에 쑥섬으로 건너와서 젊은 청년들을 데려갈 때도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데려간 많은 젊은 청년들이 결국은 아무도 못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면서기도 그랬던 것이다.


결국은 아무도 자청한 사람이 없자 재비 뽑기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사촌 동생하고 내가 뽑히고 말았다.


(계속)


'풍선(風船)'이라는 글을 2~3편으로 나누어서 써 보겠습니다.

'저가 겪은 6.25 동란(한국전쟁)'이라는 원본이 있는데 그것은 저의 아버님이 써서 저에게 보내준 편지글이었습니다.

저가 한창 글을 쓰고 있던 30대 초반에 아버님은 저에게 편지지로 40여 매 정도 되는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걸 소재로 글을 한번 써 보라고요.

하지만 글을 쓰다가 도중에 어떤 이유로 완성을 못하였고 아버님이 보내주신 편지글도 어디에 잘 넣어 두었는데 아직 찾지를 못하고 여기 첫 번째 장하고 두 번째 장만 따로 나눠져 보관이 되어 있길래 이 부분을 인용해서 아버님을 주인공 시점으로 해서 다시 한번 글을 이어서 3편 정도로 써 나가 보려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쑥섬에서 징발된 풍선/돛단배로 군경가족을 싣고 사량도까지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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