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섬이야기(68)

아버지의 편지 한 통

by 명재신

아버지의 편지 한 통



지난 6월 14일 토요일에 서울시인협회에서 주관한 철원 문학기행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철원의 문학인들'에 대해서 1999년도에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신 <지뢰꽃> 등의 시집을 여러 권을 출간하신 정춘근 시인의 특강과 철원문학관도 관람하고 철원역사문화공원, 노동당사와 소이산을 거쳐 한탄강 주상절리 코스를 다녀오는 문학기행이었습니다.


소이산에 올라서는 멀리 철원평야와 건너편에 보이는 백마고지를 건네다 보면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저 나트막한 고지를 쟁탈하느라 산화하였다는 시인의 설명에 눈물이 났습니다.


철원 소이산 정상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와 백마고지(정면 왼쪽 나트막한 산)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아버지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생각이 났습니다.


백마산 전투에 참전해서 중공군의 대공세 때 고지를 사수하다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전장에서 사흘을 죽어있다가 나흘 만에 아군의 전사자 수습과정에서 극적으로 살아 나오신 작은아버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작은아버지는 귀향을 해서 쑥섬에서 함께 사셨는데 당시에 오른쪽 관자놀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으셨고 그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으신 것을 보았기에 그걸로 수차례 광주와 대구를 오가면서 상이군인을 신청을 했는데 사지가 멀쩡하다고 해서 인정을 못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부산에 계시는 막내 작은아버지가 관계기관에 상이군인으로 인정을 해 달라고 청원도 하고 여러모로 애를 쓰셨지만 결국은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는 엑스레이 검사결과만 가지고 판정을 하는 바람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쑥섬에서 함께 사셨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이 있는 부위에서 뒤로 깊은 상처가 길이방향으로 나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있어서 얼른 보이지는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젖히면 거기에 기다랗게 상흔이 역력하게 보였습니다.


'다 죽고 나만 살았제'


작은아버지는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오른손을 흔들면서 눈에 불을 켜며 당시의 상황을 재연이라도 하려는 듯이 술을 드시고 난 뒤에 자주 무용담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아내느라 총알이 다 떨어지도록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들을 재연하면서 눈에 불을 켜셨는데 수많은 전우들이 죽어가던 백마산 고지에서의 총성까지 기억하면서 힘들어하는 줄은 우리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혹여라도 아버지를 누가 시비를 걸거나 다툼이라도 생기면은 '우리 형님을 누가 건들더냐' 하고 눈을 부라리며 다시 예의 오른 손가락을 V자로 해서는 달려드는 중공군을 처치라도 하려는 듯이 기세를 올리는 통에 누구라도 함부로 하지를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왜 작은아버님이 그렇게 눈에 불을 달고 사셨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지나간 시간 속에 경험한 무용담이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서 저는 아버지로부터 다음의 짧은 손 편지 한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2002년도 1월 9일 자로 적혀 있으니 20 여년 전 전의 편지입니다.


2002. 1. 9일 자로 아버님이 저에게 보내온 손 편지 중에 '백마산 전투'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집안의 맏이로서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당신의 동생이 한국전쟁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고향 쑥섬으로 돌아온 것을 알고서는 어떻게든 국가에 탄원을 하여서 상이군인으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결국 인정을 못 받은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았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70세 이상 참전유공자에게 명예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연금혜택을 받게 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서는 어떻게든 이번에는 인정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로 아버지가 찾아가 신청을 해 보니 '6사단 소속으로 백암산 전투에 참전은 확인이 되나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상이 안된다'라고 한다고 해서 결국은 작은집 식구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연금혜택을 받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울 작은 아부지


철원 백암산 전투에서

사흘동안 죽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울 작은 아부지

덤벼라 붙어라

뉘라도 한번 붙자면

나는 백암산전투에서

수백도 죽이고

수천도 죽은 지옥에서

죽었다가 살아온 불귀이니라

누구라도 붙으면

죽자 사자 달려들어

아무도 건들지를 못하였는데

중천을 떠돌고 있는 원혼들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시고

술만 드시면

두 눈에 혼불이 일었는데

쑥섬에서 불원천리

북쪽하늘만 바라시던

백암산 고지엔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다가 지고 있을까


2025. 6. 14

명재신


문학기행을 다녀오고 아버지의 손 편지를 찾아내서 그 내용을 읽어보는 중에 '백마산 전투'라는 전투명을 확인하고 작은아버지가 참전한 전투가 '백마고지전투'인지 '백암산전투'인지를 알아보려고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인 전투였습니다. 백마고지(395 고지)는 철원평야를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12차례나 격퇴하며 끝까지 방어에 성공한 전투였으며,


백마산 전투는 1953년 7월 금성 전투의 일부로 '백암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과 교전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백마산 전투에서 6사단이 전멸했다는 표현은 당시 전투의 치열함과 막대한 피해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했다는 걸로 봐서 저가 작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과 일치한 부분이었습니다.


'1953년 7월, 지금의 철원군 김화읍의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 중 하나였던 백마산/백암산 전투에서 국군 5사단, 8사단, 6사단 7 연대가 중공군과 격돌했습니다. 특히 6사단 7 연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싸우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6개 사단급 병력을 동원해 인해전술을 펼쳤고, 국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백마산과 1051 고지를 빼앗기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5사단이 백마산 탈환 작전을 시도했지만, 지형적 불리함과 중공군의 강력한 방어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결국 6사단 7 연대는 거의 전멸 상태가 되었고, 살아남은 병력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완전 전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피해가 컸습니다.'


즉,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철원의 백마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백마산 전투는 철원군 김화읍인 1953년 금성 전투의 일부로 '백암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아버지의 편지 속에 나오는 '백마산 전투'와 '6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것으로 봤을 때 작은아버지는 같은 철원에 있는 '백암산 전투'에 참전했다가 극적으로 생환하신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힘든 여생을 보내셨을 작은아버지의 전쟁상흔을 돌이켜 보며 철원지역에서 한국전쟁 때 산화하신 무수의 영령들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삶을 끌고 가신 작은아버지께서도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