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하레
<오션스 8>에는 배우로서 꽤나 반가운 얼굴이 등장한다. ‘9’가 쓰인 포켓볼 모양의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리는 천재 해커, 나인볼을 연기한 리한나이다. 극 중 그의 별명에 어울리게, 엔딩에서 나인볼은 ‘9 ball’s’ 당구장을 차린다.
“이름이 뭐야?”
“나인볼.”
“여기선 본명을 써.”
“그럼 에잇볼.”
첫 만남에서도 루가 환장할 정도로 빙빙 돌려 가며 본명을 안 알려주는데, 데비가 저지하지 않으면 숫자란 숫자는 다 나올 뻔했다. 떼부자가 되어서도 당구장을 차리질 않나, 아무래도 리한나의 ‘나인볼’ 캐릭터는 당구를 꽤나 좋아하는 듯하다. 미디어에서만 당구를 접해 본 내게 당구는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스포츠다. 왠지 모르게 미디어에서 늘 비행청소년의 온상지로 다뤄지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당구장의 이미지도 한몫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포켓볼보다는 4구, 3구 당구가 더 접하기 쉽다. 물론 나는 포켓볼이든 당구든 룰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당구장은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지는 데다, 뭔가 궤도를 열심히 계산해야만 할 것 같다. 물론 수학적이지 않은 스포츠는 없다지만, 당구는 유독 수학 능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재미있을 수도? 입시로 다져진 수학 능력에 살짝 기대어, 당구장으로 향해 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 당구는 3구, 4구 타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통용되는 당구 형태를 ‘캐롬 당구’라고 하고, 포켓볼은 ‘포켓 당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 걸까?
캐롬 당구와 포켓 당구는 정해진 테이블 위에서 막대로 공을 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쓰이는 공도 다르고 테이블 형태도 다르다. 포켓 당구는 ‘공을 쳐서 넣으면’ 득점하는 방식으로, 테이블 가장자리에 총 6개의 포켓이 있다. 이와 달리 캐롬 당구는 ‘공을 칠 때마다’ 득점하는 방식으로 포켓이 없고 공에 번호가 없으며, 공의 개수도 적다.
포켓 당구에서 쓰이는 기본 어휘들은 다음과 같다.
수구(cue ball): 목적구를 맞히기 위해 쳐야 하는 공으로, 일반적으로 흰색 공이 수구이다.
목적구(object ball): 수구를 쳐서 맞혀야 하는 공을 목적구라고 한다. 목적구 중 단색의 숫자가 있는 공을 ‘컬러 볼’, 줄무늬가 있는 공을 ‘스트라이프 볼’이라고 하는데, 1~8번이 컬러 볼, 9~15번이 스트라이프 볼이다.
큐(cue): 당구를 칠 때 사용하는 긴 막대로, 일반적으로 큐대라고 한다.
풋 스팟: 목적구를 배치할 때, 수구(흰 공)에 가까운 쪽을 의미한다.
브레이크 볼: 목적구들을 배치한 후 공을 분산시키기 위해 치는 첫 샷=초구. 일반적 표현으로 그냥 ‘깬다’고도 표현한다.
반면 캐롬 당구는 다음과 같은 당구대와 당구공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포켓 당구는 쳐서 ‘넣는’ 것, 캐롬 당구는 치는 것’이라고 기억하면 되겠다.
앞서 포켓볼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사실 어떤 스포츠든 직접 해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이제는 직접 쳐 봐야 할 때이다! 당구의 장점은 별도의 준비물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큐대, 당구공, 당구대 전부 당구장에 가면 구비되어 있다. 그렇게 ‘한번 해 보자’는 마음가짐만 갖고 나섰다. 다만 아직 당구장의 문을 열기엔 조금 부담스러워서, 근처 보드게임카페에 포켓볼 테이블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친구를 꼬드겨 함께 가기로 했다.
가장 기본적인 포켓볼은 ‘에잇볼’이다. 먼저 8번 볼(검은색)을 가운데에 두고 목적구들을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컬러 볼만 치는 팀, 스트라이프 볼만 치는 팀으로 두 팀(명)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이때 8번(검은색)은 마지막까지 넣으면 안 되고, 8번만 남았을 때 이를 마지막으로 넣는 팀이 이긴다.
말만 들으면 꽤나 복잡해 보이지만, 직접 쳐 보면서 배우면 이해가 쉽게 된다.
그러나 정작 내가 마주한 어려움은 복잡한 규칙이나 수학적 계산 같은 것이 아니었다. 큐대를 잡고 원하는 강도로, 원하는 방향으로 공이 나아가게 치는 것 자체가 큰 어려움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막상 쳐 보니 큐대가 삐끗하는 경우도 많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이 나아가기도 했다. 힘 조절을 잘못해서 어떤 공도 때리지 못하고 빌빌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흰 공을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 누구의 공도 들어가지 않은 채 몇십 분이 지나고, 가르쳐주던 친구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기 전 보드게임카페를 나왔다.
보드게임 카페에 포켓볼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당구장의 문을 열기엔 용기가 부족한 내게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최근에는 당구장 역시 시설이 최신화되며 꽤나 쾌적한 공간이 되었다지만, 큐대도 제대로 못 잡는 내게는 당당하게 들어가기는 떨리는 공간이다.
사실 ‘당구장’하면 어느 정도 고착된 이미지가 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구석에서 아저씨들이 짜장면 내기를 하며 탕수육을 집어먹고, 교복 넥타이를 풀어헤친 비행 청소년들의 온상지 같은 이미지… 당구에 대한 진입장벽은 당구장의 그런 이미지로부터 오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당구에 흥미가 생겼어도 가벼운 마음으로 가 보긴 어려웠다.
앞서 보드게임 카페에서 아주아주 기본기(?)만 뗀 후, 다른 날 나인볼을 치기 위해 '진짜' 당구장을 찾았다. 다만 에디터도 아버지의 존재를 빌려 들어가 봤음을 고백한다.
나인볼은 말 그대로 9개의 공만 가지고 치는 게임이다. 포켓볼의 1~15 공 중에서 9번까지만 사용하기 때문에 9번 공만 스트라이프 볼이 된다. 일반적인 포켓볼(에잇볼)과 달리, 9번 볼이 가장 가운데 위치하도록 공을 마름모꼴로 배치한다. 이후 남아 있는 공 중 1번부터 9번까지 숫자가 낮은 차례로 맞춰서 집어넣는 게임이다. 마찬가지로 9번 볼을 마지막으로 넣는 팀이 이긴다.
나인볼은 에잇볼보다 룰은 쉬운 것 같은데 치기는 더 어려웠다. 공 넘버 순서대로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에 선택지도 적고, 공의 수가 적어서 공을 맞힐 때마다 나는 경쾌한 소리도 덜 난다.
아주아주 부족한 실력과 경험에도, 포켓 당구의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당구의 매력은 내 생각과 행동이 바로바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어떤 방향과 각도로 공을 칠지 나름의 계산을 거쳐 큐대로 공을 치고 몇 초 후면 그 결과가 테이블 위에 나타난다. 비록 계산한 것과 다르더라도 상관없다. 이번 샷의 실패를 반영해서 다음 샷에는 또 다르게 쳐보면 되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내게 당구는 못 쳐도 재밌는 게임이었다. 물론 잘 치면 더 재미있을 테지만…
이왕 당구장에 간 김에 4구 당구도 쳐 봤지만, 아버지와의 불화를 막기 위해 적당한 시점에서 그만뒀다. 가족에게서 배우면 안 되는 건 운전뿐만이 아닌 듯하다.
사실 내가 들어간 당구장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흡연실이 분리되어 있어 생각했던 만큼 너구리굴 느낌은 아니었지만, 내기하는 아저씨들과 남학생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냥 동네에 하나쯤 있는 오래된 당구장에 무작정 들어간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구장은 오히려 뉴비에게 너그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당구를 배워보려는 뉴비를 꺼려할 고인물은 없기 때문이다. 훈수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들을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스승을 얻을 수 있다. 4구 당구를 쳐 보려는 하레 근처에서도 수많은 고인물들이 큐대를 잡는 방법부터 각도까지 알려주려고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었으므로, 너른 마음과 든든한 보호자만 있다면 한 시간 안에 배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 혼자 방문하긴 부담스러운 공간이므로, 잘 하든 못 하든 팟을 꾸려 가면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일단 공끼리 맞히기만 하면 상당히 경쾌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잘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당구는 수학적 스포츠라고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필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머리와 몸이 함께 움직이는 능력과 공을 원하는 방향과 강도로 칠 수 있는 신체 조절 능력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아무래도 여러 번 쳐 보면서 감을 익혀야 할 것 같다. 취미도 잘해야 하는 나에게는, 당분간 당구가 취미라고 말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구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마음먹은 대로 쏙쏙 공을 집어넣는 포켓볼 마스터가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