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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호, 발 09화

아이유와 백예린의 노랫말

에디터 일영

by 로버스앤러버스

가사가 마음에 꽂히지 않는 노래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나에게 노래의 멜로디는 포장지, 가사는 알맹이다. 포장이 화려한 선물은 이목을 끌지만 실속이 없듯이, 노래가 단지 사무실의 허전한 공기를 채우기 위한 용도가 아닌 이상 좋은 가사는 노래의 필수요건이다. 멜로디는 그 안에 있는 가사를 열어보기 위한 계기에 불과하다. 이쯤 되니 멜로디파나 작곡가들에게 질타를 받을까 두렵지만, 적어도 나의 노래 취향은 이렇다.

하지만 좋은 가사를 즐기는 사람 중에서도 가사를 직접 써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학습활동으로 가사를 적어본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작사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이렇게 먼 것은 그만큼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은 아닐까. 언뜻 생각해봐도 느슨한 구조 안에서 원하는 만큼 설명을 해도 무방한 글쓰기와 달리, 작사를 할 때는 벌스, 후렴부, 브릿지라는 특수한 요소들을 고려하면서도 멜로디에 따라 음절을 제한해야 한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3-4분 이내의 노래에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가사를 선물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가사는 정의할 수 없었던 감정을 설명해주고, 슬픈 기분을 찬찬히 살펴보게 하고, 하루 더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작사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좋은 가사들을 모아보고,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래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사를 쓰는 아이유와 백예린의 인터뷰와 가사를 재구성했다.



작사가의 말


아이유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머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시간이 흐르며 폭폭하게 쌓인 경험에서만 꺼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아이유가 김이나와 함께 진행한 인터뷰는 많은 사람들이 무편집 영상을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 눈을 빛내며 설명하는 아이유의 모습을 보면 대화에 저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들의 값진 대화에서 아이유가 곡을 쓸 때 떠올린 생각들과 작사에 대한 철학을 실컷 들어볼 수 있었다.

아이유의 가사는 한 단어로 말하자면 시적이다. 직접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생각이나 행동, 비유를 통해 전달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써내는 표현은 일반인은 쉽게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다. 좋은 가사가 담긴 아이유의 노래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았다.



1. <마음>, <에필로그> : 순수한 사랑

<마음>은 아이유가 자신의 가장 깨끗한 부분을 건져 탄생한 노래라고 한다. 그만큼 가사에 담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티 없이 맑고 순수하다. 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영원을 약속할 정도니 말이다. <마음>을 들으면 크기도 작고 색도 옅지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지지 않을 촛불 빛이 떠오른다. 비유적인 언어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가사는 운문에 가깝다.

아이유가 언제나 순수한 사랑 노래만을 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잼잼>에서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피차 알고 있고 그걸 숨길 필요도 없으니, 허울뿐인 달콤한 말이라도 실컷 해 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깨끗한 자아는 여기에, 연애에 달관해 버린 비관적인 자아는 저기에 담아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특권이다.

<에필로그>는 곡이 나오기 전에 써 놓았던 산문을 바탕으로 30분 만에 가사를 쓴 노래라고 한다. 앨범에서 아이유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내가 해석하는 <에필로그>는 깊은 사랑을 했던 사람과 이별한 후의 노래다. 그 사람은 내 곁에 실존하지도 않지만 부재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상태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순수한 사랑이다. 곁에 있어도 조바심을 내고 질투심을 와르르 쏟아내기도 하는 내 사랑이 부끄러워지는 노래다. 아이유가 쓰는 사랑은 무한한 스펙트럼과 깊이를 자랑한다. 미련 없이 담담한 <에필로그>의 가사 속에 담긴 사랑은 초월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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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제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달래주지 않으셔도
다만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
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

다시 늙어갈 때에도
감히 이 마음만은 주름도 없이
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


<에필로그>

나를 알게 되어서 기뻤는지?
나를 사랑해서 좋았었는지?
우릴 위해 불렀던 지나간 노래들이
여전히 위로가 되는지
당신이 이 모든 질문들에
"그렇다" 고 대답해준다면
그것만으로 끄덕이게 되는 나의 삶이란
오, 충분히 의미 있지요
내 맘에 아무 의문이 없어 난
이렇게 흘러가요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겠죠
가능하리라 믿어요



2. <스물셋>, <팔레트> : 자전적인

<스물셋>과 <팔레트>는 아이유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스물셋>은 솔직하고 도전적인 곡인 만큼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1월 1일만 되면 이 곡을 찾아 듣는 스물셋들이 있어 작사를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나도 그 여느 스물셋처럼 스물셋, 스물넷을 향해 가면서 이 곡을 계속 돌아봤다. 돌아볼 때마다 아이유가 “내가 말했지?”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나도 스물셋에는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와 “나 아직 애인데?”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갈팡질팡거렸다. 스물셋이라는 이상한 나이의 애매함과 양면성, 오만함과 나약함이 가사에 절묘하게 녹아 있다.

반면 <팔레트>의 아이유는 확실히 다르다. 아이유는 <팔레트>가 자신을 본질로 돌려주는 노래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물다섯의 어떤 장면을 꺼내도 다 나 같고 편하다고 덧붙였다. 스물다섯의 아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편안하게 나열할 수 있게 되었다. 별 것 아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어떤 걸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3가지 이상을 답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을 알아가는 첫 단계를 생각의 흐름대로 읊는 듯한 <팔레트>의 가사는 한 문장 한 문장 힘이 들어가 있는 <스물셋>의 가사와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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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

한 떨기 스물셋 좀 아가씨 태가 나네
다 큰 척해도 적당히 믿어줘요
얄미운 스물셋 아직 한참 멀었다 얘
덜 자란 척해도 대충 속아줘요
난, 그래 확실히 지금이 좋아요
아냐, 아냐 사실은 때려 치고 싶어요
아 알겠어요 나는 사랑이 하고 싶어
아니 돈이나 많이 벌래 맞혀봐 어느 쪽이게?


<팔레트>

긴 머리보다 반듯이 자른 단발이 좋아
하긴 그래도 좋은 날 부를 땐 참 예뻤더라
오, 왜 그럴까? 조금 촌스러운 걸 좋아해, 음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palette, 일기, 잠들었던 시간들
I like it, I'm 25 (oh)
날 미워하는 거 알아
Oh-oh-oh, I got this, I'm truly fine (oh)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백예린

백예린은 영어 가사로 전곡을 내고, 한국인 최초 영어 가사로 차트 1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영어 가사는 백예린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인데, 그의 물 같은 목소리와 흐르는 듯한 영어 발음이 만나면 특별한 가사가 없어도 괜찮은 노래가 완성된다. 하지만 여기에 백예린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가사까지 있기 때문에 백예린은 독보적인 아티스트다.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쓸 때도 많지만, 내가 느끼기에 백예린의 사랑은 누군가를 좋아하다 못해 우울해지는 사랑이다. 그런 감정의 표현이 아이유와 비교하면 조금 더 직접적이다. 또 노래 속에서 묘사되는 상황들이 감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운문보다 산문의 성격이 강하다. 가장 좋아하는 곡인 <Mr.gloomy>, 그리고 각각 1집과 2집에 실린 <0310>과 <0415>를 비교해 소개하려고 한다.


1. Mr.gloomy

<Mr.gloomy>는 제목처럼 우울하고 우울한 사랑 노래다. 백예린은 여러 노래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회고한다. 이 곡에서는 이슬비 내리는 날들과 신날 때까지 취하는 것, 다리 위에서의 산책을 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이별 후에 더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기억들을 굳이 잊어버리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우울함이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를 자각하게 하기도 한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더 매달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아이유의 <에필로그>가 초월적인 사랑이라면 이 곡은 처량해서 현실적인 사랑이다.

그보다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영화의 3요소인 내러티브, 영상, 음향을 충족하는 노래다. 첫 구절부터 나오는 ‘London bridge’라는 장소나 곧바로 이어지는 'drizzly', 'cloudy' 같은 날씨에 대한 묘사는 어떤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지게 하고, 2절로 넘어가며 깊어지는 우울함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느껴진다. 3분 35초짜리 단편영화 같은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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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of London bridge
There's no hot, hot sunny day in the city
Clouds above the head
Everything seems so calm, but

Yes, we loved drizzly days, they were beautiful
They're like you, so it's beautiful
I still feel you around me right now
That kiss under the bridge
Every lovers remind me of you
Oh, Mr. Gloomy
My baby, you take blue back into me
I, I, I, I, I'm just a girl like a cloudy day
I, I, I, I, I wanna be like fallen raindrop on your face
Boy, I, I, I, I don't wanna be forgotten from your memory
I, I, I, I really loved you
Don't you, didn't you know it?



2. <0310>과 <0415>

주변에는 1집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2집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백예린의 내면이 훨씬 단단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Loveless>, <I am not your ocean anymore> 등의 제목에서부터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사랑을 떨쳐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1집 <0310>에서 2집 <0415>로의 변화다. 두 곡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어진다. <0310>은 백예린의 노래 중에서 가장 외로운 사랑 노래다. 나는 없고 상대만 있는 관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끊어내기 힘든 관계다. 마지막까지도 떠나는 주체는 상대이고, 이별할 때 자신이 괜찮아 보였으면 하는 작은 자존심만 남아있다. 하지만 <0415>에서는 마치 각성한 사람처럼 “내가 왜 그렇게 잘해야 하고, 너처럼 되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You knew that I was no good for you'(0310)와 'I don’t know if I have to be so good'(0415) 은 가장 확실하게 대비되는 두 문장이다. 특히 ‘You knew’에서 ‘I don’t know’로 대치되는 말머리는 감정의 주체가 상대에서 자신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감정에 매몰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기 쉽지만, 각성의 순간이 찾아올 때 놓치지 말고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여러 앨범에 걸쳐 여운을 남기기에 가사의 영향력은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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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

tell me how not to get hurted or broken
even if you can’t afford loving me anymore
you knew that I was no good for you
.
you knew that I wasn’t better than you
I hope that I could be seemed really fine with you leaving


<0415>

I don’t know if I have to be so good
I don’t know if I have to be like you
.
I was serious, but why is it always have to be me?
Me, have to feel so bad
Me, have to blind myself


아이유와 백예린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애정을 담아 가사를 살펴보며 내가 왜 이들의 가사를 그렇게 반복해서 들었는지도 더 또렷해졌다. 좋은 가사를 쓰는 공식은 없다. 아이유가 시적인 가사로 깊은 울림을 준다면, 백예린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까지도 솔직하게 써 어느 한 줄이 마음에 탁 걸리게 만든다. 내면이 단단한 작사가의 가사는 삶의 지향점이 되고,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작사가의 가사는 위로와 공감이 된다. 가사를 훑어보며 내가 정의한 작사가는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이 특별함을 알고, 그것을 글로 깎아내고 붙일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 자체가 음악적 원천이 되어야 하기에 작사는 꽤나 피곤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작사가가 되려는 목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작사의 세계가 더 멀게 느껴지는 듯하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남이 정성껏 갈고닦은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앞으로도 빛나는 단어들로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소비자의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출처:

아이유 <마음> 앨범 커버. https://music.bugs.co.kr/track/4345083

아이유 정규 5집 <라일락> 트랙리스트.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103109766H

아이유 '스물셋' 뮤직비디오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42Gtm4-Ax2U

아이유 '팔레트' 뮤직비디오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d9IxdwEFk1c

백예린 인스타그램(@yerin_the_genuine). https://www.instagram.com/yerin_the_genuine/

백예린 정규 1집 <Every letter I sent you> 앨범 커버 일부.
백예린 정규 2집 <tellusboutyourself> 앨범 컨셉 사진. https://www.instagram.com/yerin_the_genu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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