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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호, 발 08화

전화에 대한 단상

에디터 먼지

by 로버스앤러버스
이 정도로 옛날 사람은 아닙니다만...


발신(發信): 소식이나 우편 또는 전신을 보냄. 또는 그런 것.


전화에 대한 단상


전화는 불편하다. 전화를 하면, 상대의 음성과 그 사이로 새나오는 소음으로부터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주변 분위기는 어떤지 가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전화 너머 소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불편하다. 전화 너머로 이어지는 미묘한 정적이나, 숨소리, 목소리 높낮이의 변화를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마음이 불안에 요동치기도 한다. 전화는 불안하기에 불편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불안은 상대방과의 깊은 친밀감을 가능케 한다. 눈앞에 없는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면, 마치 내 옆에 바짝 당겨 앉은 사람처럼 느껴지기에 그렇다. 그래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 몇 줄의 문자 메시지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 존재는 어딘가 불편하고, 이상하리만치 가깝다.


전화는 용기를 주기도,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상대가 눈앞에 없기에 조금은 말을 쉽게 전할 수 있다. 눈앞에 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은 ‘모두에게 삭제’를 누를 수 있는 카톡 메시지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상대에게 뱉은 말, 상대로부터 내가 받은 말 모두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을 한 번 뱉기 위해선 용기와 책임이 필요하다.

전화를 통해 상대와 공유한 말들은, 그 순간의 나만이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귀한 말이 되기도 하고, 누구도 아닌 나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아픈 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전화는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은 공유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할 때,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공유하게 되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과 공간을 오히려 초월하는 문자 메시지와도 다르다. 이도 저도 아닌 불완전함이 전화의 특징이다.


그래서일까. 요즈음은 웬만하면 전화를 잘 하지 않게 된다. 조금의 불편함이나 있을지 모를 변수를 내심 줄이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친구들과도 카톡이나 DM으로 안부를 주고받지, 전화를 자주 하지는 않게 된다. 친밀해지고픈 애인과 잠들기 전 하던 통화 정도가 어른이 되고 나서 기억하는 전화에 대한 추억의 전부다.


전화에 대한 추억을 유독 애틋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전화에 얽힌 향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정말 전화를 많이 걸지 않았나. 우리, 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발신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어린 날들


콜렉트콜

"상대방 전화번호와 우물 정자를 눌러주세요. 잠시 연결되는 동안 자신을 알려주세요."
"엄마~ 나 리코더~~~"

콜렉트콜은 수신자가 통화료를 부담하는 서비스다.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면, 3초가량의 시간 동안 나를 알릴 수 있고, 그 시간 동안 내가 누군지 수신자에게 강력하게 어필해야 한다. 와이파이만 잡히면 언제든 카톡을 보낼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정해진 양의 링이나 알이 떨어지면 전화나 문자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는데 이때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어준 것이 바로 이 콜렉트콜이다.

콜렉트콜은 정말 아주 급할 때나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콜렉트콜 요금을 부담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치트키였다. 주로 대상은 엄마 아빠였다. 매일 알림장을 적고 문구점에서 준비물을 사가야 했던 초등학생 시절, 리코더를 놓고 오거나 사놓은 크레파스나 색종이, 때로는 수저통을 놓고 오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로 가져다 달라고 해야 했다. 그럼 엄마는 몰래 뒷문으로 찾아와 나를 불러서 놓고 간 준비물을 넣어주곤 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준비물 없다며? 콜렉트콜도 필요 없겠지. 아마도 모르겠지, 3초 동안 후다닥 나를 밝히고 엄마가 받아주길 기다리는 그 3초간의 시간을.


집전화

“안녕하세요! 저 일영이 친구 먼지인데요! 혹시 일영이 있나요? 일영이 좀 바꿔주세요!”

지금에야 집 전화가 없는 집이 대부분이지만, 초등학생 시절만 돌이켜봐도 휴대폰을 갖고 있는 친구가 드물었다. 그래서 친구네 집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내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도 친구가 휴대폰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알이나 링이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집전화로 전화를 해야 했을 때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친구가 바로 받을 때도 있지만, 언제는 친구의 언니나 오빠가, 대부분은 친구의 부모님이 받았다. 그렇기에, 나는 매번 내뱉는 집전화 예절 루틴이라는 게 있었다. 일단 내가 누군지 밝히고 내 친구가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친구를 바꿔달라고 말해야 했다. 처음 친구 집에 전화하던 어린 시절엔, 심호흡을 크게 세 번 정도 쉬고 외워뒀던 문장을 벌벌 떨며 말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엔 하도 많이 전화해서, 내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누군지 아시는 친구 부모님도 계셨다. 그땐, 집전화로 친구의 가족을 자연스럽게 접했었다. 집 전화는 온 가족이 모두 공유하니까. 지금의 난 얼마나 내 친구들을 가족에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우리 엄만 지금 내 친구들을 얼마나 알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내 친구들의 가족들은 과연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실까?


컬러링

♪ 느낌이 오잖아~ 떨리고 있잖아~언제까지 눈치만 볼 거니 ~♪

지금도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강승윤의 ‘본능적으로’와 아이유의 ‘내 손을 잡아’를 들으면, ‘아… 이거 너 컬러링이었잖아 ㅡㅡ’라며 질색을 하곤 한다. 나는 좋아서 컬러링으로 설정해둔 건데, 컬러링의 주인에게 지겹게 전화하느라 수백 번을 강제로 들을 수밖에 없던 내 친구들은 이 노래에 질리게 된 것이다(?).

컬러링은 특이하다.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나는 절대 들을 수 없다. 내게 전화를 의식적으로 ‘거는’ 사람만 들을 수 있기에 쉽게 기억에 남는다. 전화를 많이 하던 시절엔 컬러링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좌우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컬러링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표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싸이월드 bgm처럼,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처럼. 음질은 더 구렸지만, 더 강력했다!

지금도 컬러링을 설정해 놓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때면 왠지 마음이 조금 특별해진다. 아직도 컬러링을 설정해뒀구나. 자주 전화해서 컬러링을 들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

“하레야, 나 핸드폰 좀 빌려줄 수 있어? 나 엄마한테 전화 좀 걸게.”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를 대라고 하면 손에 꼽는다. 지금 내가 외우고 있는 번호는 다섯 개 남짓. 오랫동안 바뀌지 않은 가족들의 번호, 초등학생 때부터 바뀌지 않은 오랜 친구들의 번호 정도랄까. 예전엔 공중전화에서 쉽게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 만큼 많이 외우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 만난 친구들의 번호는 외우지 못한다. 왜냐면 번호를 외울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깐. 카톡으로만 친구 추가가 되어있고 정작 전화번호는 없는 사이도 많다. 갑자기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누군가에게 꼭 전화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기억나는 번호가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전형적인 MBTI 'N'들의 상상.



사랑


발신번호 표시 제한 *23#

“여보세요? 누구세요?”
“….”

초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아이에게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 걸어본 기억 한 번쯤은 있을 거다. 그때의 두근거림은 희한하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절대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그 애가 내 맘을 알아주면 좋겠고. 동시에 내 마음을 들킨다면 죽고 싶을 것 같으니 그 애는 내 마음을 절대로 몰라야 했다. 이 엄청난 양가감정이라니. 그래서 몰래 그 애한테 티는 내고 싶으면서도, 나인 줄은 몰랐으면 좋겠고, 그 아이의 목소리는 듣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발신번호 표시제한을 애용했다.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애가 전화를 받으면 차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뚝 끊어버렸었다. 웃기지만 우습진 않은 초딩먼지의 설렘과 불안의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좋아서

“너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었나?”

자주 얼굴을 보던 사람인데, 밤늦게 전화 한 통 했을 때. “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었나?” 문득 그 사람을 새로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할지 모를, 호감의 시작이다.

만나서 대화할 때는 목소리보다 그 사람의 생김새나, 표정이나, 몸짓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화를 하면 같은 대화도 느낌이 다르다. 유선 상으로 들려오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유난히 좋을 때가 있다. 만나서 대화할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전화만 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보고 싶고, 콱 안기고 싶고. 늦은 밤 잠긴 목소리에 확 설레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사람만의 말버릇에 빠지기도 한다. 이 사람은 특정 단어를 말하기 전에 숨을 멈춘다던가, 말 사이에 스며든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전화에 스민 기분 좋은 설렘은 별의별 이유로 상대를 사랑하게 만들곤 한다.


카톡 이별

“너는 무슨 중학생도 아니고 카톡으로 헤어지자고 하니?”

사랑 이야기를 하면 이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지. 전화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성이다. 나는 상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내가 한 말에 대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의 상황을 견뎌야 한다. 전화는 카톡과 다르다.

카톡은 상대의 반응을 미리 보고 내 반응을 준비할 수 있지만, 전화는 그렇지 않다. 카톡으로 띡- 이별을 통보하고, 연인의 답장을 슬쩍 미리보기로 본 후에, 답장을 고민하고 보내고 싶은 그 욕망. 그 욕망을 전화로는 절대 실현할 수 없다.

카톡으로 이별을 말하는 이유는, 이별 통보를 받고 고통스러워할 상대방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다.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전화로 말을 하면, 그 순간의 상대방의 고통을 내가 함께 견뎌야 한다. 상대는 내게 이별의 이유를 물을 수도 있고, 앞으로 잘하겠다며 기회를 달랠 수도, 매달릴 수도 있고, 어쩌면 엉엉 울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쓰레기라며 욕을 할 수도 있다. 예측 불가능한 상대의 반응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별 통보를 받는 입장에서는 카톡 이별을 용납하기 어렵다. 만나서, 최소한 전화로는 말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겪는 이 고통과 좌절을 그 사람도 조금은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한 때는 사랑을 했거나 적어도 할 거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별을 고할 때에는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전화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 이젠 용건 없이 전화하거나, 무턱대고 전화하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화는 특별한 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냥, 문득, 전화가 하고 싶어질 때 그 전화를 반갑게 받아주는 상대방과 오랜만에 통화하고 싶다. 그리고 그 상대방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고 싶다. 원래 전화란 그런거니까.




출처:

옛날 전화기 사진. GPO 745 Rotary Dial Telephone ⓒAmazon https://www.amazon.in/GPO-746-Rotary-Telephone-Black/dp/B008MV7O8K

공중전화 사진. TVN <응답하라 1988> EP.6, 2015.11.15.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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