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일영
누군가 가장 존경하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이라고 답한다. 백지상태에서 몇 가지 규칙들과 감각, 직관만을 가지고 자기만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일 말이다. 화가, 영화감독, 작가, 디자이너, 카피라이터까지도 여기에 해당한다. 고등학생 때까지 교과서만 들여다봤던 나는 이 중 어떤 것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지만, 그나마 일상에서 전공자를 만나고 결과물을 만들어 볼 수 있었던 분야는 시각디자인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전 국민 인스타그램 시대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시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디자인을 못 하면 그 영역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남에게 맡겨야 한다는 점이 답답했다. 그래서 생존형으로 유튜브를 보며 툴 사용법을 익혔는데, 생각보다 창작하는 과정이 즐거워 4-5시간을 할애해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열정과 무관하게 디자인에서 심플함과 깔끔함 이상의 감각을 발(發)하기란 생각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툴러(툴을 다룰 줄 아는 사람)’와 ‘디자이너’를 따로 지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철저히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 그중 가장 감탄이 나오는 디자인을 우리 잡지에 적용해 모방해보려고 한다. 비전공자임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대학에 와서 딱히 배운 게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공지식을 접하면 알게 모르게 사고체계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 전공자와 나를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근본 없는 이 디자인 탐구기가 나와 같은 디자인 머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첫째는 ‘창의적이고 시선을 끄는가’, 둘째는 ‘내가 따라 할 수 있는가’이다.
첫 번째 기준에 관하여: 아주 개인적인 취향을 따른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중앙 정렬을 좋아하고 목적에 맞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텍스트의 가독성이 높아야 하고, 이미지나 감성 전달이 중요하면 텍스트도 디자인의 ‘예쁨’에 기여하는 역할로 빠져야 한다. 둘 중 어떤 목적이든, 브랜드 이미지와 잘 어우러지는 재치가 한 방울 있으면 더 좋다.
두 번째 기준에 관하여: 디자인에 손을 댄 이후로 탐나는 디자인을 볼 때마다 ‘어, 저거 내가 할 수 있을까?’하며 자문하게 되었다. 툴에 존재하는 모든 기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디자인을 하다 보니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은데, 이때 디자인이 본업이 아니라면 이 기술이 내가 단시간에 익힐 수 있는 수준인지 판단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시간과 정신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범접할 수 없는/욕심과 희망이 생기는/유형인 것 같아 경계하게 되는'까지 가지각색의 수식어가 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디자인을 분류했다.
고난도의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는 단순히 텍스트와 이미지를 보기 좋은 위치에 배치하는 것 이상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다. 어떻게 따라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것은 물론, 사실 구현하는 방법이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다. 좌측 ‘모베러웍스’의 이미지처럼 캐릭터의 구획별로 다른 효과를 넣은 방법이나 우측 SM 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처럼 글씨에 떼어지는 효과를 넣은 방법은 차라리 모르고 싶다. 고도의 기술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이다.
두 이미지 모두 첫 번째 기준을 90% 이상 만족시키지만, '모베러웍스'의 이미지는 나의 보수적인 디자인관을 흔들었다. 위 이미지는 무신사 테라스에서 열린 워크숍 공지인데, 워크숍이 열리는 일시와 장소가 아래에 10pt 정도의 글씨로 적혀 있다. 중요한 글씨를 두 배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저 이미지의 타깃은 이미 브랜드의 철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타협했다. (예쁘니까…) 어쨌거나 이 유형은 한 이미지를 제작하는 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센스 있는 디자인으로 소구하는 브랜드나 엔터테인먼트처럼 규모가 큰 업계에서 주로 사용된다.
1번 유형과 달리 2차원 안에 머물면서도 기본 폰트를 변형하지 않은 디자인은 나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과 희망을 준다. 하지만 심플한 디자인일수록 디테일이 부족하면 완성도가 낮아 보이기 때문에 섣불리 따라 했다가 ‘어.. 똑같이 따라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같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첫 번째 ‘뉴닉’의 이미지는 정보성, 두 번째 ‘29cm’의 이미지는 감성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둘 모두 가독성이 높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디자인이다. 특히 ‘뉴닉’의 디자인을 보면 상, 하단에 연재 중인 시리즈의 이름을 담고 중앙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더 강한 대비로 중심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정보를 쉽게 전달한다’는 브랜드 아이덴티티와도 맞아떨어지고, 이름/나이/복용법으로 칸이 나눠진 약봉지가 연상되어 보는 맛도 있다. 알약이 선을 의도적으로 넘어간 부분이나 콘텐츠의 내용을 살짝 알려주는 빨간색 말풍선 같은 디테일도 좋다. '29cm'의 이미지는 사진을 활용한 조금 더 심플한 이미지인데, 이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에서 더 빛난다. 실제로 게재하면 ‘CALENDAR’와 아래 작은 글씨의 코멘트까지 쏙 들어오도록 정방형으로 잘린다. 인스타그램 시대 SNS 관리자의 자세가 돋보이는 위치 계산이다.
디자인에도 트렌드가 있기 때문에 특정 풍의 디자인이 여러 브랜드에서 동시에 보일 때가 있는데, 현시점에서는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그렇다. 인스타그램에는 카드 뉴스 형식의 콘텐츠를 올리는 것이 정통이지만, 이제는 고정된 레이아웃에서 벗어나 텍스트와 도형, 일러스트로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 제품 판매 이상으로 소비자에게 가치를 전달해야 하는 젊은 브랜드에서 흔히 쓰는 방식이다.
나는 변화에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 유행하는 것들을 우선 경계하기 때문에, 이 유형의 디자인도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만 왠지 수용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유행이 슬슬 지나가고 있는 최근에 들어서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있다. 디자인으로 먼저 시선을 끌어야 내용에도 관심을 가지는 시대이니, 남들과 한눈에 구별되는 실험적인 디자인을 시도할 수밖에 없겠지 싶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유형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이제 개별 브랜드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디자인이 브랜딩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브랜드의 방향성에 따라 트렌드를 선도하는 브랜드와 본인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브랜드로 다시 나눌 수 있었고, 전자의 대표로는 편의점 컨셉의 라이프스타일 스토어 ‘나이스웨더’, 후자의 대표로는 빵과 커피를 파는 브랜드 ‘프릳츠커피컴퍼니(이하 프릳츠)’를 가져왔다.
나이스웨더는 힙함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힙함은 한 마디로 ‘나와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어쩐지 닮고 싶은 느낌’이다. 나이스웨더가 우리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많다. ‘신개념 편의점’이라는 컨셉 자체도 새로운데, 대부분의 디자인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정보를 친절하게 주기보다 필요한 키워드만을 전달하고, 이미지에 낯선 대상들을 조합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왠지 모르게 다가서기 힘들고 멋있는 브랜드’로 보이지만, 모두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진 인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거리감을 조성한다고 해서 트렌드의 대표주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스웨더는 '아주 완성도 높은' 낯선 디자인을 선보이기에 성공한 브랜드다. 어중간하게 특이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하기 때문에 선뜻 따라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훔치고 싶은 건 훔치는 배짱 있는 잡지인 만큼 한 이미지를 골라 아래에서 따라 해 볼 예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의 브랜딩을 지키며 자기의 색깔로 승부하는 브랜드도 있다. 프릳츠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는 이미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을 사용한다. 한글을 쓰는 게 반드시 멋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영어만 쓴다고 비판하는 쪽이 조금 더 이상하다. 프릳츠의 브랜드 컨셉은 ‘코리안 빈티지’로, 한글과 물 빠진 옛날 색감을 주로 사용한다. 그런 요소는 우리 눈에 익숙하기 때문에 나이스웨더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지고, 도나스 상자에서 반죽을 젓고 있는 영문 모를 물개도 한몫하고 있다. 내가 프릳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트렌드를 따라갈 법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브랜딩을 고집하기 때문인데, 아래 프릳츠 대표의 인터뷰를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저는 '트렌드'라는 단어가 무서워요. 멋있고 새롭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프릳츠는 코어에 더 집중합니다. (PUBLY, 명확한 개성으로 만든 다름의 브랜드: 프릳츠 커피 (2) 중)
드디어 디자인에 직접 부딪혀 볼 시간이다. 이번 무작정 디자인 실습대상은 아래 두 개의 이미지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일단 도전해보는 것이다. 폰트와 레이아웃을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하되 로버스앤러버스에 적용해 볼 예정이다. 툴은 일러스트레이터만 활용한다.
로버스앤러버스의 컬러 팔레트와 레퍼런스 이미지를 두고 비장하게 시작했다. 빨간약은 롭럽 캐릭터로 대체할 예정이다.
30분의 작업 시간이 흘러 아래 이미지처럼 얼추 비슷한 결과물이 탄생했다. 폰트는 갖고 있는 것 중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숫자 2의 모양이나 글씨의 높이 등 세밀한 부분을 보면 다른 폰트임을 알 수 있다. 또 원래 이미지의 알약처럼 투명한 효과를 내는 방법은 검색하기가 까다로워 다른 텍스처 효과로 대체했다. 대부분은 내가 아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일러스트 점선 만들기’와 ‘패스 모서리 둥글게 만드는 법’ 두 가지는 구글링이 필요했는데, 후자는 결국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원래 이미지에서 특별히 기술을 요하는 부분이 없기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이 나왔다.
나이스웨더의 디자인을 카피하려면 우선 배경 이미지와 가운데 도형에 들어갈 이미지, 이렇게 두 가지 소스가 필요했다. 배경 이미지는 ‘rob’에 관한 이미지, 가운데 이미지는 ‘love’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찾고 싶었다. 곧장 마음의 고향 'unsplash'와 'pixabay'로 향했다. 운 좋게 마음에 드는 귀여운 이미지 두 장을 바로 찾았지만, 배경 이미지가 조금 더 어두웠으면 해서 밝기 조정에 도전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힘들었다. 작업 시간도 50분 정도 소요됐다. 하트 모양으로 사진이 잘리게 하는 건 간단했지만, 하트 풍선이 밖으로 살짝 나오게 연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전공자들이 보면 화를 낼 것 같은 야매 기술로 처리하고 말았다. 뉴닉을 따라한 첫 번째 실습보다 싱크로율이 낮아 보이는데, 가장자리에 있는 네 가지 폰트 선택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특히 나이스웨더 텍스트 로고의 폰트처럼 통통하고 납작한 폰트는 많았지만 직접 적용해보니 이미지의 차이가 컸다. 로버스앤러버스를 적어 넣으니 어쩐지 힙하고 시원시원한 느낌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물씬 난다.
나이스웨더의 원모양 로고는 하트로 대체했는데, 가운데나 네 모서리의 도형 중 한 가지는 다른 모양의 도형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좋았겠다. 얼떨결에 11개의 하트가 들어간 사랑 가득한 이미지가 되었다.
숙련도가 낮은 탓에 애를 먹었지만, 그럼에도 디자인에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술보다는 아이디어였다. 평소처럼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따라 할 레퍼런스가 있으니 정신적인 피로나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 예상되는 결과물이 이미 나와 있어 이것저것 시도해 보느라 낭비하는 시간도 적었다. 만약 내가 따라한 이미지들의 디자인을 처음부터 새로 짜야 했다면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틀을 깨는 사고를 하기란 참 어렵다. 경험이 적은 상태에서 레퍼런스를 많이 찾아보다 보면 거기에 발이 묶여 그 이상의 사고를 못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특히 디자인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면 첫 술에 배부르면 안 된다. 다양한 이미지들을 보며 취하고 싶은 요소들을 머리에 입력하고 하나씩 변형해 보면서 서서히 감각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타고난 감각이 없더라도 차곡차곡 쌓인 서툰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줄 때까지!
출처:
모베러웍스 인스타그램(@mobetterworks). https://www.instagram.com/mobetterworks/
SM Entertainment Group(@smtown). https://www.instagram.com/p/CYArtq5rhiR/
뉴닉 인스타그램(@newneek.official). https://www.instagram.com/newneek.official/
29CM 인스타그램(@29cm.official). https://www.instagram.com/p/CXA2ISELxei/
클래스101 인스타그램(@class101_official). https://www.instagram.com/class101_official/
텀블벅 인스타그램(@tumblbug). https://www.instagram.com/tumblbug/
나이스웨더 인스타그램(@niceweather.seoul). https://www.instagram.com/niceweather.seoul/
프릳츠 인스타그램(@fritzcoffeecompany). https://www.instagram.com/fritzcoffeecompany/
프릳츠 인용 문구. 퍼블리 콘텐츠 '명확한 개성으로 만든 다름의 브랜드: 프릳츠 커피(2)'. https://publy.co/content/3849?fr=chapter-next-chapter-button